장화
장화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0.04.2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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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지난밤 비가 내렸다. 나는 고무장화를 신고 마당으로 나간다. 장화만 신으면 힘이 생기고 걸음이 바빠진다. 그래야 고작 스무 평 남짓 마당과 텃밭을 가꾸는 일을 하면서 말이다. 풀숲에도 거침없이 들어간다. 전원에 들어와 살면서 제일 많이 애용하는 것이 장화지 싶다.

이 투박한 장화를 신고 곱디고운 꽃을 키우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심고 가꾼다. 장화를 신고 흙을 만지는 순간 나는 무서울 것도 부러운 것도 어떤 욕심도 생기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 즐겁다. 거친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비가와도 바람이 불어도 장마철 물 고인 길도 망설이지 않고 걸어간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조바심도 없어진다. 단단하게 보호 받는 기분이다.

특히 진흙밭으로 나갈 때는 장화가 더없이 요긴하다. 장화가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흙이 잔뜩 묻어도 물로 쓱싹 닦으면 그만이다. 장화를 신고 레스토랑에도 갔었다. 사람들이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생각이 난다. 내 이웃에 사는 그녀와 각자 집에서 일하다가 커피가 생각나면 어떤 날은 그녀의 집으로 어떤 날은 우리 집에서 서로 장화를 신은 채 꽃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다가 오고 간다. 겨울에도 털 장화로 무장하고 눈길도 푹푹 빠져가며 신나게 다닌다.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비 오는 날 노란 장화를 신고 물웅덩이에서 찰박찰박 흙탕물을 차며 신나게 노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행복이다. 작은 꽃 한 송이, 투박한 장화를 신으며 느끼는 즐거움이 행복이다. 장화가 발에 맞지 않아 헐거워진 뒤축이 털럭대는 소리에서 힘이 느껴진다.

신발장에는 참 많은 종류의 신발이 있다. 멋 내기 뾰족구두부터 운동화, 등산화, 단화, 트레킹 화 등등 많은 신발종류와 기능에 따라 골라 신어야 한다. 그래도 막상 나서려면 마땅치 않을 때가 있다. 구두를 신으면 발도 불편하고 걸음도 조신해진다. 고무장화는 가격도 구두에 비하면 엄청 저렴하다. 질긴 건 말할 것도 없다. 한 켤레가지면 몇 년은 신는다. 나는 늘 목이 긴 꽃무늬 장화를 신고 있다. 사계절 비가 오는 날이나 쨍쨍 갠 날이나 항상 장화를 신는다. 전원에 들어와 장화 예찬론자가 된듯하다.

지난 주말에는 딸아이가 왔다. 아이의 손을 잡고 마당 곳곳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며 “엄마는 장화를 신으면 이 숲 속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서운 것이 없다.”고 했더니 딸아이 하는 말이 “내 장화는 엄마야.”한다. 딸아이의 말에 깜짝 놀랐다. “ 하긴 세상에 엄마만 있으면 무서운 것이 없던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엄마가 되고 보니 자식이 제일 무섭더라. 너도 자식 낳아보면 알 거야.”라고 했다. 아이의 말을 듣고 내가 아이들에게 든든한 장화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 본다. 내 자식들이 혹여 진창에 빠질까, 돌부리에 걸릴까, 벌레라도 밟을까 늘 촉을 세우고 살아왔다. 우리 부모님도 자갈길을 걸으며 뒤따라오는 자식들에게 부드러운 길을 내주려고 돌을 치우며 가셨으리라.

코로나 19 때문에 두 달여 출입이 불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장화 신은 날이 많았다. 불편함을 이용해 또 다른 여유를 즐긴다. 오늘도 장화를 신고 마당으로 나간다. 마당에 백리향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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