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요 속에 살아있는 우리의 전통문화
민요 속에 살아있는 우리의 전통문화
  • 조순현 박사·민요연구가
  • 승인 2020.04.2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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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조순현 박사·민요연구가
조순현 박사·민요연구가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보릿고개로 불리는 춘궁기를 넘겨야 했다. 여름보리가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곡식이 다 떨어져 굶주릴 수밖에 없는 보릿고개. 가뭄이나 커다란 홍수로 흉년이 들면 보릿고개는 더욱 넘기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따듯한 봄이 오면 산에 가서 산나물을 캐어 먹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절망하지 않았다. 먹을거리가 부족했던 보릿고개에 자연이 식탁이었다. 이른 봄 산과 들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산나물이 부족한 식량을 채워 주었다. 겨울을 이기고 나온 산나물은 통일벼 등 벼 품종개량과 비료, 농약 공급확대 등의 식량증산정책으로 1970년대 말쯤 보릿고개가 서서히 사라질 때까지 오랜 세월동안 땟거리 음식을 만드는데 보태졌다.

이른 봄부터 산과 들에 돋아나는 냉이, 쑥, 고비, 고사리, 홑잎나물, 취나물, 참나물, 질경이, 싸리나물, 수리치기, 씀바귀 등 여러 나물은 양식이었고 반찬이었다. 질경이는 된장국이나 죽을 끓여 먹었다. 수매듭은 된장국이나 삶아서 무쳐 먹었다. 쑥은 메밀가루나 밀가루에 버무려 쪄 먹거나 쑥밥을 해먹기도 했다. 쌀 한 줌, 보리쌀 한 줌에 나물을 많이 넣고 죽을 끓여도 부황이 나지 않아 훌륭한 땟거리가 되었다. 나물에 감자도 넣고 이것저것 막 집어넣어가지고 나물죽을 끓이기도 했다.

봄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산과 들로 나가 봄나물을 캐는 일은 어린 소녀뿐만 아니라 부녀자들의 중요한 일과였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물을 뜯으러 가기 때문에 가까운 산과 들에는 나물이 없었다. 아침에 점심밥을 싸가지고 먼 산에 가서 나물을 뜯었다. 다래끼에 손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뜯었다. 나물을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이고 온다고 “보나물”이라고도 했다. 논농사가 시작되지 않은 논둑에 겨우내 살찌우고 봄을 기다리고 있는 씀바귀를 캐다가 논둑이 허물어진다고 논 주인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집집마다 봄이면 삶은 나물을 마당가득 멍석에 널어 말렸다. 말린 나물은 한해 양식에 보태졌다.

세월이 변해 봄나물을 뜯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시설채소재배로 한 겨울에도 두릅 등 싱싱한 채소가 지천이니 굳이 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먹을거리가 충분하고 텃밭에 냉이, 취나물 등을 재배하기 때문에 험한 산에 올라가서 뜯을 이유가 많지 않다. 더러 건강식으로 두릅이나 산나물을 뜯는 경우가 있지만, 옛날처럼 보나물 뜯는 사람은 만나기 쉽지 않다. 봄철 마당가득 삶은 산나물을 널려 말리던 풍경도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앞산 뒷산에서 나물을 뜯으며 재잘거리던 처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랫소리도 듣기 어렵다.

음성군 삼성면 상곡리에서 나고 자란 이영호(여,1938생)씨는 스물한 살 뒷집 총각에게 시집을 가기 전에 올케와 사이좋게 보나물을 뜯으러 다녔다. 동네 가까이는 모두 뜯어가서 10리 밖까지 가서 나물을 뜯어왔다. 뜯어온 나물은 쪄서 무쳐 먹기도 하고 말리기도 했다. 나물 뜯으러 산에 오르면서 나물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도라지는 장가가고/ 가지디기 시집가고/ 원추리는 후황간다/

이영호씨는 전통사회의 결혼 풍습을 나물에 비교해서 노래한다. 결혼식 날 신랑 신부 친구들이 신랑과 신부를 따라가는 것을 `후황 간다'고 했단다. 신랑은 도라지에 비유하고 신부는 가지에 비유했다. 신랑 신부 친구들은 원추리에 비유했다. 이영호씨는 쌀보다 나물을 더 많이 넣고 끓인 죽을 배불리 못 먹어도 정 많았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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