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소녀, 이 시대의 자화상
눈먼 소녀, 이 시대의 자화상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0.04.1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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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지개를 본 적이 몇 번 있던가. 더군다나 쌍무지개를…,

요즘 그림책 도서를 골라 읽다가 김선현 작가의 《그림의 힘》에 수록된 89점의 명화 중에서 몇몇 작품을 골라 다시 세밀한 감상을 시작했다. 그중 영국 화가 존 밀레이의 작품 <눈먼 소녀>와 마커스 스톤의 <훔친 키스>가 잔상으로 남는다.

<눈먼 소녀>의 배경은 앞을 못 보는 소녀와 여동생처럼 보이는 어린 소녀가 황금 들녘을 배경으로 서 있는 장면이다. 자매가 걸터앉은 들녘의 뒷부분엔 두 줄의 아치 모양의 쌍무지개가 선명하게 떠 있고 들녘을 누비는 몇 마리의 새무리가 한가로이 종종거리는 평화로운 분위기다. 존 밀레이 자신이 제목을 `눈먼 소녀'로 정하여 자매로 이해하지만, 언뜻 보면 시각 장애가 있는 젊은 엄마와 초등 1학년 정도쯤 보이는 어린이로 보인다. 둘이 함께 쓴 오렌지 컬러의 숄이 반쯤 젖은 것으로 보아 한차례 소나기가 퍼부은 것 같다. 눈먼 소녀의 무릎엔 피아노 건반을 닮은 악기가 놓여 있고 오른손은 보라색 제비꽃 같은 작은 풀꽃을 어루만지는 모습이다. 그 옆의 어린아이는 무지개를 보면서 그 느낌을 자세히 전달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이 입은 옷차림은 낡아 솔기가 뜯어지고 구멍도 보일 정도로 남루하지만, 표정은 한없이 평화롭다.

`눈먼 소녀'와 `쌍무지개'가 의미하는 그림의 깊이 또한 매우 크다. 시가 은유라는 메타포로 표현하듯이 그림 또한 같은 맥락이다. 어쩌면 눈먼 소녀는 소유하지 못할 욕망들에 갇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리 자화상인도 모른다. 쌍무지개라는 축복이 가까운 곳에서 손짓하는 데도 욕망에 가린 두 눈은 그 현상을 볼 수 없다. 몸에 무거운 장식을 두른 상태로는 스스로가 짊어진 올무로 인해 평화를 만끽할 수 없다. 눈먼 소녀 옆의 어린아이처럼 쌍무지개를 볼 수 있으려면 순수하고 가벼운 상태여야 한다. 욕망에 눈먼 상태로는 신이 우리에게 준 마지막 행복의 봉인을 풀 수 없다.

마커스 스톤의 <훔친 키스>는 흰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성모상 앞에 놓인 긴 벤치에 피곤한 듯 비스듬히 누워 잠든 모습이다. 양복을 입은 애인이 다가와 측은지심으로 바라보지만, 그 두 사람을 다시 성모마리아가 내려다보는 구도이다. 눈먼 소녀와 의자에 기대어 잠든 여인은 아마 열심히 땅 긋기를 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의 지친 모습일 것이다. 완전한 인간은 놀이할 때라고 한다. 이 땅의 것은 이 땅의 소산이므로 일용할 만큼만 거두며 가볍게 살 때 놀이하는 인간으로 살 수 있다.

긴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쌍무지개를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움은 한줄기 소낙비가 지난 후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코로나 문제로 지구나 인간 모두 강제 휴지기에 들었지만, 이 역경 속에서 우리가 얻는 것도 있을 것이다. 욕망한 만큼 우리는 이번에 많은 것을 잃었지만, 지구가 인간을 향해 건 이 브레이크는 어쩌면 유기체를 살리려는 지구의 강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인간과 지구는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이다. 뿌리가 상하면 가지도 상한다. 지구가 근육통을 앓으면 인간 역시 몸살 나고 각 개체도 발열하는 법이다. 인간 중심의 개발과 욕망이 빚은 참극이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세상 만물의 구조를 새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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