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폐허를 응시하며 투표하라
이 폐허를 응시하며 투표하라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0.04.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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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의 갈망이 오랜 두려움과 분열을 극복했음을 증명한다. 기존 제도는 서로에 대한 두려움과 부족(不足)에 대한 두려움을 기초로 세워졌고, 더 큰 부족함과 두려움의 대상을 만들어 냈다. 그러한 두려움과 부족은 이타주의와 상호부조, 연대를 통해, 그리고 두려움이 아닌 희망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개인과 조직의 행동을 통해 날마다 조금씩 완화된다. 이런 것들은 선출만 되면 많은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림자 정부와도 같다. 어떤 면에서 재난은 이런 것들을 `선출'한다. 왜냐하면 비상 상황에서는 두려움과 분열은 쓸모없어지는 반면, 이런 능력과 유대가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재난은 세상이 지금과는 다른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희망과 관용과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기본적인 운영 원칙인 상호부조와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민사회도 보여준다.

세상은 그런 기반 위에 세워질 수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일상적인 고통과 빈곤과 외로움, 위기의 순간에 살인적 두려움과 기회주의를 낳는 오랜 분열을 일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유일한 낙원이며, 그것은 절대로 온전하고 완전하고 안정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낙원은 늘 문제와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나며, 우리가 하려는 일은 바로 낙원을 만드는 것이다.」

코로나19의 와중에 다시 꺼내 든 레베카 솔닛의 `대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혁명적 공동체에 대한 정치사회적 탐사'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다 읽었다. 비교적 평온한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서늘함이 새삼 사무치는 비상의 시대. 수요단상 첫머리에 길게 인용한 문장들은 낱말 하나하나가 빠짐없이 주옥이다.

그리고 오늘 2020년 4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제21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일. 세계가 코로나19의 침공으로 팬데믹(Pandemic.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는 현상)의 공포에 휘둘리고 있는 와중에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치러지는 선거는 민주주의의 등불이며, 인류에게 혁명적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26.69%, 유례없는 사전 선거 투표의 뜨거운 열기가 어디로 어떻게 향했는지 행방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코로나19 감염을 우려한 분산심리가 작용된 것이라는 기성 정치엘리트들의 분석은 틀렸다. 우선 나부터도 100m 가까이 줄이 서 있는 사람의 집중에도 걱정 없이 간격을 유지한 채 기다린 끝에 사전투표를 했다. 그때 사전 투표소에 나온 유권자 가운데 `사람이 많다'는 불안으로 되돌아가는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감염이 두렵다면 애당초 투표소에 나오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엘리트를 자처하는 정치평론가들의 현장 무시, 현실에 대한 무지몽매함은 여전히 과거로의 회귀에 집착하고 있는 듯하다.

대한민국에서의 코로나19는 상당히 낙관적이다. 확진자는 두 자리 숫자로 줄어들고, 완치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으나 아직 마음 놓을 상황은 아니다. 다만 레비카 솔닛의 말처럼 “우리의 갈망이 오랜 두려움과 분열을 극복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시간은 분명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는 당당하게 떨쳐내고 있는 `두려움'만큼 `분열'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하기 어렵다.

<호모 사피언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즈 기고를 통해 “세계는 지금 협력해야 할 시점이며, 한국에서 배우라”고 촉구하면서 “분열은 위기를 연장시킬 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 심각한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반면 연대는 코로나19 뿐만 아니라 모든 미래의 전염병과 위기에 대한 승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 지구적 연대와 협력이 국내 정치 사정과 반드시 순치될 수는 없다. 정치를 직업으로 여기는 후보자와 과거의 굴절된 영광과 정권 찬탈에 골몰하고 있는 정당이라는 이름의 무리들에게 선거는 치열한 생존권 지키기의 수단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희망과 용기, 배려와 믿음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우리의 존엄한 생존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우리의 `낙원'은 투표용지를 든 그대의 당당하고 든든한 두 손으로 만들어진다. 이 폐허를 응시하며 투표하라. 분열로 돌아갈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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