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댐수몰지역 발굴과 그 후(2)
대청댐수몰지역 발굴과 그 후(2)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20.04.12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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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1977년 한해가 저무는 12월에 대청댐 수몰지역에서 2기의 고인돌이 발굴되었다. 고인돌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大石蓋墓), 유럽에서는 돌멘(Dolmen) 또는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이라고 부른다. 우리 역사에서 고인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시대 명문장가인 이규보가 1241년에 펴낸 동국이상국집의 남행일기에 나타난다. 이미 고려시대에도 고인돌[支石]을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괸바위, 굄돌, 칠성바위, 상여바위, 거북바위, 독바위, 장군바위 등으로도 불리운다. 거북바위는 오래 살기를 바라는 신앙대상으로, 칠성바위는 칠성신앙의 대상으로 섬기어 고인돌에 정화수를 떠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오오하라 도시타케(大原利武)는 옥천지역을 답사하고 유적을 촬영한 유리원판사진을 남겼다. 그중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에서 찍은 적석총(積石塚)으로 기록한 사진 1장이 있다. 옥천 안터 고인돌이다. 첫 조사(1922년)부터 발굴(1977년)까지 반세기가 지났어도 변함없이 묵묵히 우리 곁에 남아 있었다. 이는 대청댐 수몰지역에서 처음 발굴조사된 고인돌이다. 안터 고인돌과 함께 선돌이 발굴되었다. 고인돌과 선돌이 짝을 이룬 좋은 예이며, 고인돌에 묻힌 사람과 관련하여 선돌을 해석하기도 한다. 고인돌(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호)과 선돌(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56호)은 발굴조사 후 2~3차례의 이전과정을 거쳐 안터마을 앞 선사공원에 복원되어 있다. 고인돌과 선돌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기에 가능하였다. 이곳저곳 떠돌다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다행이다.

옥천 안터 고인돌과 선돌 발굴조사를 마친 뒤인 1977년 12월 13일 충북대학교 학도호국단 군용트럭에 발굴장비를 싣고 짐칸 위에 올라타 피반령 고개를 넘어 문의면 아득이 고인돌 유적으로 향하였다. 매서운 찬바람을 온몸으로 버틴 기억이 생생하다. 이 유적에서 고인돌, 돌덧널무덤, 저장고, 선돌 등 6기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공간이었다. 고인돌 덮개돌은 2조각으로 깨져 있고 무덤방은 도굴된 상태였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무덤방 밖에서 긴 네모꼴형태(32.4×23.5㎝)의 돌판 1점이 출토되었다. 돌 표면에 홈을 새겨 북두칠성, 영자리, 작은곰자리, 케페우스, 카시오페이아 등 5개의 별자리를 표현하였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천문관과 천문지식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별자리 돌판으로 천문학 사적인 자료로서 중요하다. 아득이 고인돌유적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구들 가운데 고인돌 1기만이 문의문화재단지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고인돌은 발굴 후 이전 복원하여 선사시대 사람들의 숨결을 전해주고 있다.

대청댐 수몰지역 발굴조사(1977~1978년)는 수몰 면적에 비해 조사된 유적은 4개 유적뿐으로 매우 적다. 47개 유적이 조사된 충주댐 발굴조사(1982~1985년)와 크게 비교된다. 대청댐 완공 후 계절에 따라 수몰선의 높낮이 변화는 지형침식을 지속적으로 일으키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묻혀 있던 여러 시대의 다양한 유물들이 드러났다. 구석기시대의 뗀석기, 낚시꾼에 의해 건져 올려진 청동기시대의 한국식동검[細形銅劍], 삼국시대의 토기조각, 고려~조선시대의 자기와 금속유물 등이 노출되는 것으로 보면 여러 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적들이 물속에 잠겨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당시의 학문적 상황을 감안하여도 아쉬움이 남는다. 갈수기 때 노출되는 지형면에 대한 조사만이라도 체계적으로 실시하여 유적의 종류, 성격, 시대, 현상 등 기본현황 파악이라도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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