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의병장 가문 박춘무 선생의 얼을 기리며
3대 의병장 가문 박춘무 선생의 얼을 기리며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04.06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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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신분에 따르는 사회적 국가적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지배층의 도덕적인 의무를 뜻하는 프랑스 격언으로 명예(노블레스)만큼 의무(오블리주)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충청도를 충효의 고장이라 말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 많아서 붙여진 자랑스런 이름이다. 청주의 상징물 가로수길이 시작되는 아양산(부모산)을 중심으로 복대동과 봉명동 일대에서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 박춘무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침략으로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 위기의 순간이 왔다. 이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던지며 분연히 일어난 의병들에 의해 최초로 왜적으로부터 성을 탈환한 곳이 바로 청주성이다. 이 청주성 탈환 전투의 1등 공신이 바로 박춘무 의병장이다. 율곡 선생 제자였던 선생은 왜적의 국토 유린 소식을 듣고 청주 복대동과 봉명동 일대에서 아들 동명과 동생 춘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은 격문을 지어 7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해 청주 부모산성에서 직접 군사 훈련시키며 청주성 탈환을 준비하던 중 기회가 오자 옥천의 조헌 의병과 영규 대사의 지도를 받는 승병들과 함께 합동 작전으로 청주성을 탈환한 것이다.

박춘무 선생은 평소 자식들에게 전장에서 용기가 없는 것은 효가 아니라고 가르쳤으며, 자손들에게 나라를 위해 충성하도록 교육하였다. 그 결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킨 아들 동명과 이괄의 난 때 의병을 일으킨 손자 홍원과 더불어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빛나는 가문이 된 것이다.

선생에 관한 기록은 1961년 청주지에 소개되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1988년 승전지인 청주 중앙공원에 박춘무전장기적비가 세워졌다. 1992년 건립한 흥덕구 비하동에 있는 박춘무삼대창의사적비를 통해 나라를 향한 그의 충성이 후대의 귀감이 되고 있는데, 박춘무 선생과 부모산성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청주성을 탈환 후 박춘무 선생은 의병들을 더 훈련 시키기 위해 부모산성을 점령했다가 왜군들에게 포위됐다. 그런데 그곳에는 우물이 없었다. 왜군의 포위 속에 군량미는 물론 식수가 부족해 사망하는 의병들이 속출하던 절체절명의 순간 기진하여 박춘무 의병장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때 꿈에 백발의 도사가 나타나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여기서 잠을 자고 있느냐! 어서 일어나 저 소나무를 뽑으라”는 말을 듣고 깨어나 군사들에게 소나무를 뽑게 했다. 그러자 큰물이 솟아났고 사기가 중천한 부하들이 전열을 가다듬고 왜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이때부터 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아양산을 부모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지금도 그때 의병들을 살린 우물인`모유정(어머니의 젓)'이 존재하고 있다.

3대에 걸친 목숨을 건 나라사랑 실천의 주인공 가문 박춘무 의병장 집안의 자기희생 솔선수범에 감동한 민초들이 힘을 합쳐서 청주성을 가장 먼저 탈환하고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된 것이다. 진정한 지도력은 지도층의 희생과 섬김의 모습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하며, 특권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고 고귀한 신분일수록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박춘무 선생은 오늘도 엄숙하게 말하고 있다.

필자가 봉직하는 봉명고에서는 교육자치시대 민주시민 교육 차원에서 박춘무 선생의 얼을 계승하는 교육 과정을 운영하려 한다. 의병에서 시작된 근대민주시민의식이 독립운동으로,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계승되는 것을 학생들과 함께 나누고 발전시켜 가슴 따뜻한 세계시민으로 육성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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