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사람을 만나면
길잃은 사람을 만나면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20.04.05 20: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점차 기억력이 흐릿해져 병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지 않은가? 몇 해 전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근사한 핸드백에서 꺼낸 물건은 TV 리모컨이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건망증의 예가 다양하고 하도 어이없어 한참을 웃고, 각자 더 심한 증상을 말하곤 한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에서 코르사코프 증후군에 대해 알게 되었다. 건망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며, 이 증후군을 앓으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시간과 날짜, 방금 먹은 음식조차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는 심한 기억력 장애를 보인다고 한다.

내게도 이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사건이 있는데, 2011년 4월 12일이었다. (나는 이 날짜를 한 맺힌 듯 정확히 기억한다) 나는 교탁 앞에 서 있었는데, 청소 시간이 되자 칠판 정리를 맡은 아이가 앞으로 나와 칠판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그때 모의고사를 치르느라 칠판 위에 놓아둔 둥근 시계가 벽을 따라 올라가서 교실 앞 중앙에 걸려있던 태극기를 건드렸고, 그것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나무판 두 겹을 겹쳐 만든 태극기는 내 머리에 부딪혀서 두 개의 판으로 쪼개졌다.

그날 X-레이 사진을 찍은 의사는 내 두개골에 뚜렷한 금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미세한 균열이 생겼는지는 CT나 MRI를 찍어봐야 한다며 근육 이완제와 항생제를 처방해주었다. 머리의 혈관들이 강하게 맥동하는 느낌과 두개골 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였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가 없었다. 열이 나는 듯도 했고 참을만한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상처가 나고 피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CT에서도 이상은 없었지만, 문제는 피로와 기억력이었다. 아침마다 눈을 떠서 상황 판단을 하느라 잠시 시간이 걸렸다. 출근하여 앉는 순간 벌써 피곤이 몰려오고 온종일 돌을 끌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만도 자체의 무게에 눌리고, 뇌도 돌처럼 기능이 멈춘 듯했다. 강한 충격은 내 모든 기억 파일을 꺼내오기 힘든 아주 깊숙한 곳에 옮겨놓았고, 정보를 찾으려면 조용히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삶을 관통하는 굵고 긴 시간의 밧줄에 수많은 사건과 의미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그런데 강한 충격으로 내 시간의 밧줄이 조각조각 절단되고, 흐트러지고, 어느 조각은 영영 잃어버린 것 같았다. 무엇보다 사건 이후에 발생하는 일들이 뇌에 잘 저장되지 않았다. 연속성이 없어져서일 것이다. 순간순간 생활의 앞뒤가 빠르게 연결되지 않아 당황하고, 실수하고, 일을 번복해야 하고, 모든 것이 더 어려워졌다. 그러나 수업과 업무, 생활을 지속해야 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없으니, 내 하소연은 엄살이며 무능함에 대한 핑계일 뿐이었다. 오로지 혼자의 몫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꼬박 6개월 넘게 흘러 11월에, 예전처럼 매끈하지는 않지만 내 시간 밧줄 토막들이 다시 정렬하였고, 이어졌고, 새로운 사건도 그럭저럭 연결되어 저장된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쪼개진 태극기를 버렸다.

책에는 중증 코르사코프 증후군 환자들이 나온다. 실수, 어설픔, 기이함, 뇌 손상, 회복 불가능과 같은 외적 증상 너머까지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하고 사려 깊은 시선이 인상적이다. 잠시 길을 잃어본 사람으로서, 길을 찾고자 애쓰는 내면의 투쟁을 이해하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에서 위로를 받는다.

우리는 누구나 갑작스러운 사고나 시간에 의해 길을 잃을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