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기도
눈물의 기도
  • 장홍훈 신부·청주 양업고 교장
  • 승인 2020.04.0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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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장홍훈 세르지오 신부·양업고 교장
장홍훈 세르지오 신부·양업고 교장

 

`장미의 이름'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 보면 `예수께서 과연 웃었는지?'를 두고 격론을 벌인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경에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표현은 없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셨다'라는 이야기는 나온다.“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시어 그 도성을 보고 우시며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루카 19,41-42).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운명을 걱정하며 `무력감의 눈물'을 흘리셨다. 또 다른 장면에서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산란해지셨다. 예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요한 11,33-36).

이렇게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또 한 번 `연민의 눈물'을 흘리신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일을 몸소 겪으셨다. 온몸으로 고뇌를 받아들이면서 느끼시며 고통 속에서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셨다. 이 눈물의 기도는 사랑이다.

지난주 프란치스코 교황은 텅 빈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홀로 기도하던 모습이 종파를 넘어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비를 맞으며 텅 빈 광장을 휘청휘청 걷는 교황의 모습은 인류의 눈물을 주님께 전하는 것 같았다. 전염병의 종식을 간구하는 기도도 애절하다 못해 비통했다. 3월 29일 주일 강론에서 이렇게 호소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분명히 우셨고, 지금 나도 울고 있습니다.”그러면서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우리는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름대로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에 사람들의 고통이 들어오지 않아 울 수 없다면, 주님께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님은 당신과 함께 또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계십니다. 오늘 눈물의 일요일, 많은 사람이 울고 있습니다. 울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예수님처럼 우는 은혜를 구합시다.”

작금 우리는 코로나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울고, 경제적 고통으로 울고, 사회적 거리만큼이나 벌어지는 인정의 거리 때문에 울고 있다. 코로나 극복을 위해 헌신하는 의사, 간호사, 마트의 직원, 미화원, 간병인, 운송인, 경찰, 자원봉사자들, 많은 다른 이들…. 신문의 머리기사나 잡지에, 혹은 TV 쇼의 포토라인에 거창하게 나오지 않는 그들이지만, 한계 앞에서 인내심을 발휘하고 희생을 하며, 희망을 퍼트리는 감동의 눈물을 뿌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선생님. 우리 자녀들이 코로나의 위기를 감당하고 헤쳐나가는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눈물의 기도를 올리는지 모른다. 이 `눈물의 기도'와 보이지 않는 `눈물의 봉사'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최고의 백신이요 무기이자, 최고의 사랑의 실천이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으며, 태양은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꽃은 자신을 위해 향기를 퍼트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돕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인생은 물론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이 절망을 보내시는 것은 우리를 죽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헤르만 헤세). 코로나19를 통해 나, 너, 우리는 같은 운명의 한배를 탄 지구가족임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하며, 이 시간 두 손 모으고 눈물의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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