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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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0.03.3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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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요즘은 그동안 소홀했던 집안일을 하느라 바쁘게 지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날 수업할 공부를 하느라 사실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은 요즘 싱글벙글이다. 물론 남편의 일도 코로나로 인해 타격을 받았지만, 삼시세끼 따뜻한 밥상을 받아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동안 내가 어지간히 집안일이며 남편에게 소홀했었나 보다.

미뤄놨던 일 중에는 쌓아놓았던 책들도 있다. 요즘 한 권 한 권 무너뜨리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늘은 `톨스토이의 비밀 일기'를 집어들었다. 그 책을 만난 건 몇 년 전 청주의 헌책방에서였다. 헌책방은 어떤 책을 사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어떤 책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찾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갈 때마다 가슴이 설레곤 한다. 그날도 이 칸 저 칸을 천천히 돌아다녔지만 딱히 눈에 꽂히는 책이 없었다. 그렇게 책방을 나오려는데 출입구 쪽 책장에 눈을 돌리는 순간 `톨스토이의 비밀 일기'가 보였다. 15년 전에 나온 그 책에서는 오래된 냄새가 풍겼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일기는 1910년 7월29일부터 그가 숨지기 일주 전인 10월 29일까지 쓰여졌다. 톨스토이는 평소에도 메모와 일기를 빠지지 않고 썼다. 그럼에도, 또 다른 `비밀 일기'를 쓰게 된 이유는 아마도 아내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의 갈등을 적기 위함이었으리라. 비밀일기에는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부간의 갈등, 자식과의 갈등, 친구와의 갈등이 주를 이룬다. 대문호 톨스토이가 아닌, 평범한 개인 톨스토이의 모습을 대면하는 듯해 연민의 정도 순간순간 느끼곤 한다.

그런데 문득, 톨스토이의 아내 소피야는 왜 그토록 남편을 힘들게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톨스토이의 비밀 일기'에서만 본다면 소피야는 좋은 부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일기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위안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반성하는 글이기 때문에 아내 소피야의 입장을 알 수는 없다.

톨스토이와 소피야는 16살의 나이 차가 난다. 18살의 나이로 결혼한 소피야는 13명의 자식을 낳았고, 집안일과 육아를 혼자 도맡아 했다. 그리고 악필이었던 톨스토이의 원고를 교정하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톨스토이는 귀족집안이었는데 왜 유모나 집안일을 봐주는 사람을 두지 않았을까. 그것은 톨스토이가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톨스토이에게 아내인 소피야는 어떤 존재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말년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리를 민중을 위해 포기하려 톨스토이는 비밀유언장을 작성한다. 소피야가 정신분열증을 보인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한다. 배신감이었을 것이다. 남편과 자식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아내로서는 도저히 용납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톨스토이가 위대한 작가, 성자로 추앙받을지 모르지만 가장 약한 여자인 아내를 그토록 아프고 고통스럽게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톨스토이는 자신의 상황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무위'와 `침묵'이라고 말한다. 무위, 하지만 그것은 아내에 대한 방임이었다. 그토록 아파하는 아내를 위해 하는 것이 `무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위대함 뒤에 숨은 아픔, 고통, 갈등을 알게 된 책이었다. 무위란 자연에 따라 행하고 사람의 생각이나 힘을 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야말로 서로의 행복을 위해 `무위'가 아닐까. 밤사이 된서리가 내려도 자연은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듯 우리도 조용히 이 시간을 잘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돌아오는 계절을 잘 맞이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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