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청산
빚 청산
  • 이은일 수필가
  • 승인 2020.03.3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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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수필가

 

집에 엄마가 와 계신다. 십이 년 전에 양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하셨는데 그중 왼쪽이 감염되어 재수술해야만 한단다. 지금은 재수술에 앞서 기존의 인공관절을 꺼내고 항생제 덩어리를 넣어 염증을 치료하는 중이다. 지난 4주간 병원에서 집중치료를 끝내고 우선 퇴원했다. 집에서 2주 있다가 다시 입원해서 염증이 없어진 것이 확인되면 새 인공관절을 넣을 예정이다. 그래서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온 것이다. 재수술이 처음보다 기간도 오래 걸리고 훨씬 힘든 것 같다.

지난 한 달, 마스크 쓰고 장 보러 갈 때 빼고는 거의 집에만 머물러 있었다.

읽고 싶었던 책도 좀 읽으면서 미뤄둔 그림을 그렸다. 덕분에 오늘 드디어 수복도(壽福圖)를 완성했다. 내가 그린 수복도는 글자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그 안에 십장생(十長生)을 그려 넣은 목숨 수 자와, 입신양명을 의미하는 책가도(冊架圖)가 그려진 복 복 자가 세로로 크게 자리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형을 준 쉰여덟 개의 수, 복 글자로 테두리를 두른 그림이다. 마침 엄마가 와 계시니 엄마를 생각하면서 그릴 수 있어서 특히 좋았다.

엄마는 빚지는 것을 무척 싫어하신다. 금전적인 것은 물론, 어쩌다 다른 사람에게 신세라도 지게 되면 반드시 이자 쳐서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것은 부모 자식 사이에도 예외가 아니다.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다며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하룻밤 묵고 가는 법이 없었다. 결혼해서 스물아홉 해 지나도록 친정 부모님이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가신 적이 내 기억에는 딱 한 번, 그것도 아침 일찍 조반도 안 드시고 가신 적이 있었다.

그러니 딸 집에서 2주 동안이나 수발 받으며 지내는 것을 어떻게 여기실지 짐작이 간다. 사위 눈치도 보일 테고. 보조기를 찬 다리를 전혀 구부릴 수 없으니 도저히 혼자 생활할 순 없겠고 마지못해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딸만큼 편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입맛 당기는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바로 해 드리고 계시는 동안 불편하지 않게 마음도 잘 살펴야겠다. 다행히 엄마와 나는 좋아하는 음식이 대부분 비슷하다. 그리고 고맙게도 남편이 꼭 우리 집으로 모셔와 보살펴 드리라고 신신당부해 주었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자갈을 주워 하루 30전을 받아 그것으로 세 식구가 먹고사는 여인이 있었다. 지나가던 사또가 여인의 벌이로 몇 식구가, 어떻게 먹고사는지 물었다.

“예, 저는 10전으로 이자를 내야 하며 또 10전은 저축하고 마지막 10전으로 생활해 갑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여인이 설명하기를 시어머님이 드시는 10전은 빚에 대한 이자이며, 아들이 먹는 10전은 저축에 해당하며, 자신이 먹는 10전이 생활비라고 말했다. 가족을 위해 일하거나 금전을 지출할 때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 준 이야기다.

부모에게 하는 모든 것은 빚을 갚는 것이다.

낳고 키워준 은혜는 접어두더라도 세 아이의 산후조리를 다 엄마가 해 주셨다. 몇 년 전 큰 수술을 받았을 때 덕석잠 자 가며 병간호해 준 사람도 엄마였다.

남은 열흘 동안 마음과 정성을 다해보리라. 받은 빚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이제 기회가 왔으니 밀린 이자의 백중 하나라도 갚아봐야지.

밤새 발편잠에 평온한 엄마 얼굴을 보면서 그래도 묵은 빚을 조금은 청산하는 듯해 마음이 편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엄마 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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