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댐수몰지역 발굴과 그 후(1)
대청댐수몰지역 발굴과 그 후(1)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20.03.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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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라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땅은 사람이 사는 환경이다. 땅에 살면서 남긴 흔적들이 인류 역사고, 인류의 발달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자료가 잘 보존되어 있다. 땅속에 묻혀 있는 과거의 역사를 찾는 작업은 고고학의 몫이다. 특히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선사시대의 역사는 온전히 고고학 연구성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970년대는 충북지역에 고고학이 싹을 틔우던 시기이다. 땅속에서 충북의 역사를 찾아가는 개척의 시대인 셈이다. 이 시기에 제천 점말 용굴유적, 단양 상시바위그늘유적, 청주 샘골유적, 청주 두루봉 동굴유적 등 구석기시대 유적과 옥천 안터 고인돌·선돌유적, 청주 아득이 고인돌유적 등 청동기시대 유적 및 고려시대 폐사지인 김생사지(金生寺址) 등이 조사됐다. 선사시대 충북의 역사를 밝혀주는 유적들이 중심을 이룬다.

이 가운데 청주 샘골유적, 옥천 안터유적, 청주 아득이유적, 청주 김생사지는 대청댐 수몰지역에서 조사된 유적이다. 대청댐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건설된 다목적 댐으로 1975~1980년의 5년 9개월에 걸쳐 완공된 댐이다. 유역면적이 우리나라 국토면적의 약 10%에 해당하는 금강에 건설된 대청댐은 수몰면적도 넓어 땅속에 존재한 역사의 흔적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된 유적은 4개뿐이다. 당시의 학문수준, 전문인력의 절대적 부족, 매장문화유산의 조사와 연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결여 등 여러 요인이 있었겠으나 우리 선조가 남긴 삶의 역사를 밝혀내지 못함은 많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청주 샘골유적은 금강 상류지역에서 현생 인류의 삶의 흔적이 최초로 확인된 후기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금강을 배경으로 충북에 살았던 현생 인류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처음 제공해준다. 석영, 규암, 유문암 등의 돌감으로 제작한 여러 종류의 석기 중 긁개와 밀개가 전체유물의 3/4을 차지하고 있음은 구석기인들이 샘골에서 사냥한 짐승의 가죽작업 등을 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영위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금강유역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이 석기제작에 자주 사용하였던 돌감은 석영이나 샘골유적에서는 유문암 등 새로운 돌감이 등장한다. 돌감의 변화는 새로운 석기제작기술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음을 알려주는데 당시 구석기인들의 활동영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사용 목적에 따라 석기제작기술이 발달했음을 의미하며, 양질의 돌감을 얻고자 활동영역이 확대되었음을 알려준다.

샘골의 구석기인들은 매우 슬기로운 생활을 하였음이 돌감, 제작기술, 석기종류가 말해준다. 이 유적은 필자가 구석기시대 유적 발굴조사에 처음 참가해 애정과 열정을 갖고 조사한 유적이며, 구석기연구의 길을 걷도록 이끌어주었다.

구석기인들의 생활은 계절의 지배를 받았다. 봄에는 수분이 많은 어린 식물, 여름에는 풋과일, 늦가을에는 견과 등을 찾아 그들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며 삶을 꾸려갔다. 구석기인들은 숙련된 수렵채집인이라는 거의 동일한 종류의 삶을 영위했다. 인류의 수렵채집사회에서는 20~30명이 군집을 이루는 사회조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계절에 따라 동식물계의 모든 부분을 이용하면서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삶을 지속했던 사람들이다. 먹거리를 찾아 이동생활을 했던 만큼 그들이 남긴 역사의 흔적들도 광범위하게 분포했을 것으로 여겨지나 확인된 것은 샘골유적 뿐이다.

샘골유적 발굴 후 대청댐 보조댐 언저리에서 대전 용호동유적, 신탄진동유적과 청주 노산리유적(6개 지점)에서 중기~후기 구석기시대 유적들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로 보면 많은 구석기인의 삶터들이 물속에 잠겨 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먼 훗날 그들의 역사가 밝혀지기를 기대하며 물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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