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내였다
흙내였다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0.03.26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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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그래도 봄은 온다. 지상의 사람들 다 같이 불행을 겪고 있다. 남녘에서 꽃소식이 전해오지만, 꽃을 즐길 형편이 아니다. 우리 집 마당에도 산수유 꽃이 노랗게 웃지만 마주 웃어주기조차 민망하다. 외출이 불편한 요즈음 마당에 엎드려 흙내를 맡고 있다. 흙내는 어떤 꽃향기보다 향기롭다.

어린아이들이 밤새 잘 자고 일어나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낑낑거리며 엄마 품으로 파고든다. 나도 자고 일어나면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본다. 밥 먹는 것보다 땅 내 먼저 맡고 싶은 거다. 아니 땅을 비집고 나오는 새싹들과 눈인사를 나눠야 안심이 된다고 말하는 게 맞다.

오늘은 지난겨울에 수도 공사하느라 파헤쳐 망가진 마당을 손질해야겠다. 겨울공사라 대충 끌어 묻고 겨울을 났다. 낮은 곳은 흙을 채우고 높은 곳은 깎아내고 여름을 대비해 물길을 두어야 한다. 작년에 꽃을 피운 묵은 잎들도 다듬을 생각이다.

사랑하고, 배신하고 말을 할 수도 들을 수도 있는 사람들과는 장시간 있다 보면 서로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들어야 하고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된다. 돌아서면 마음이 편치 않을 때도 있다. 때로는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흙을 만지고 있으면 생각이 단순해지며 정신이 맑아진다. 흙에서 종일 뒹굴어도 뒤끝이 깨끗하다. 흙은 비록 무생물이지만 생명을 키워내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있기에 씨앗을 품기만 하면 싹을 틔우는지, 정녕 흙속에는 어머니의 신이 계신가 싶다. 땅은 지모신관(地母神 觀)이다.

흙이란 암석에서 유래된 광물질, 장구한 세월에 걸쳐 생물에서 생겨난 탄산칼슘, 인산화합물, 유기물 비교적 시간적으로 일천한 생물체의 잔존물, 그리고 결합수가 작은 입자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사전에 있다. 흙을 어찌 과학적인 언어로 표현하랴. 흙은 사람의 본연이자 되돌아가야 할 숙명적인 근원지다. 태어난 땅과 흙에서 떠날 수 없고 어느 때고 되돌아가야 한다. 인생은 흙에서 태어나 흙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 행로다.

음양오행에 하늘은 양으로 남자, 땅은 음, 여자를 의미한다. 모든 사물이나 사람은 땅을 디디고 건재한다. 세상이 변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은 살아가는 이치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어도 건축공법이 발전했다고 해도 물이 흘러가는 길을 막으면 자연은 사람을 다치게 한다.

나는 이 산골 작은 터에서 흙내를 맡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밖에 나가 사람들과 수많은 말을 늘어놓는다. 그 많은 말 중에 몇 마디나 유용한 말이 있었을까. 집에 돌아와 돌이켜 생각하면 후회와 마음이 불편하여 머리가 무거울 때가 있다. 불편한 심기를 마당에 엎드려 다 고자질한다. 흙을 만지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해진다. 그 다정한 위로는 흙내였다. 내가 돌아갈 흙을 만지고 있으면 욕심도 삿된 마음도 조금씩 내려놓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내일이 기대된다.

종일 마당에 엎드려 땅을 고르고 묵은 가지를 쳐냈다. 몸은 천근인데 마음은 새털처럼 가볍고 맑다. 이 험한 시국에 나만 이렇게 평온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이 지상의 불행을 거두어 달라고 지신께 부탁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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