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시작되는 곳
희망이 시작되는 곳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20.03.2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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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얼른 친구에게 안부를 물었다. 지난 12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속수무책으로 확산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눔의 집'이 3월 12일부터 자발적 코호트 격리에 들어갔다는 뉴스 때문이었다. 친구는 중증장애인 생활 시설에서 일한다. 열흘간이나 출퇴근하지 않고 시설 이용인과 동숙한다고 하니 설마 회사나 시에서 강요한 것은 아닌지, 내 좁은 소견으로는 친구에 대한 걱정만이 앞섰다. 평소 감기에라도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며 면역력이 약한 이용인들을 걱정하던 친구였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결정한 것이라며 상황을 설명해주는 친구의 차분한 목소리에서 부끄러움이 먼저 다가왔다. 코로나19 사태로 누군가의 삶은 좁아지고 느려졌고 누군가의 삶은 더욱 치열해지고 급박해졌다. 나는 오히려 아무것도 못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주변의 안위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위기에 대처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사명감에 숙연함이 느껴졌다.

우리 삶의 속도에 변화를 일으킨 주범은 바이러스와 두려움이다. 모두 보이지 않지만, 바이러스는 실체이고 두려움은 실체가 아니다. 실체든 허상이든 바이러스나 두려움은 보이지 않게 급속도로 확산하여 같은 방식으로 감염증을 일으키는 것 같다.

실체의 확산과 감염은 그야말로 실체여서 물리적으로 제거하거나 이동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두려움은 물리적으로 조심하기보다 마음 씀으로 조절 가능할 수도 있다. 내 속에서 두려움이 증식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두려움으로부터 감염되는 것도 의지에 따라 줄이거나 막을 수 있다.

바이러스가 생물체 안에서만 살아있는 것처럼 두려움도 생물체 안에서만 살아난다. 가만 생각해보니 희망도 생물체 안에서만 살아난다. 바이러스, 두려움, 희망. 이 세 가지는 모두 생명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그러나 바이러스와 달리 두려움과 희망이라는 것은 동물에게만 생겨나는 것 같다. (관찰할 수도 없고 충분한 과학적 뒷받침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식물도 그런 반응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두려움은 동물이든 사람이든 본능처럼 느낀다. 그런데 희망은 두려움과 다르다. 동물이 삶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현실의 삶을 인내하고 개선해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사람만이 희망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에도 이상을 만들어내고, 확신을 담보하지 않고도 미래에 신념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같다. 심지어 그 허상을 공유할 수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확산하여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상황이다. 두려움도 그만한 위세로 퍼져 나가고 있다.

두려움과 희망은 미래에 작용하는 믿음의 동종이다. 우리 인류는 희망이라는 바이러스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증식시키고 다른 사람을 감염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작동시킬 때다. 물론 희망을 품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바이러스는 실체이다. 실체를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지, 어떻게 접촉을 막을 수 있는지 과학적 근거에 따른 방법을 알고 적용해야 한다. 희망은 성실한 실천이 따를 때 현실로 보답한다. 두려움을 이기고 희망의 빛을 믿을 때 바이러스라는 실체를 더 잘 물리칠 수 있지 않을까?

쉬운 일이 아니다. 감염의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불쑥불쑥 쳐들어온다. 희망 지수는 안정되지 않아 어느 순간 바닥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또다시 끌어올려야 한다. 나를 위해, 옆 사람을 위해. 성실하게 실천하며 헌신하는 내 친구와 그녀의 동료들이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만큼이나 강력한 희망 바이러스가 곳곳에서 불쑥불쑥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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