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청풍도호부의 정문 ‘제천 청풍 금남루(堤川 淸風 錦南樓)’
옛 청풍도호부의 정문 ‘제천 청풍 금남루(堤川 淸風 錦南樓)’
  • 김형래 강동대 교수
  • 승인 2020.03.2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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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위) 제천 청풍 금남루, (아래) 이방운 금병산도.
(위) 제천 청풍 금남루, (아래) 이방운 금병산도.

 

제천시 청풍면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여 삼국시대부터 수운이 크게 발달한 곳으로 문물이 번성하여 1317년(충숙왕 4)에는 군으로 승격되고 1660년(현종 원년)에는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의 관향(貫鄕)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되는 등 역사 문화의 뿌리가 깊은 고장이다.

옛 청풍부(淸風府)의 읍치는 청풍면 읍리였으나 현재는 충주댐 건설로 물에 잠겨 버렸다. 물에 잠기기 전 청풍면의 중심이던 읍리는, 마을의 관문인 팔영루 앞에 역대 관리들의 송덕비가 줄을 짓고 마을 안 곳곳에 조선시대의 관아나 그 부속건물들이 섰으며 강가 언덕 위에는 날아갈 듯한 한벽루(寒碧樓)가 시인묵객을 불러들이던 아름다운 고을이었다. 또 남한강가 북진나루에 서던 청풍장은 제천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서 인근의 생활중심이 되었다.

수많은 시인과 묵객이 노래했던 옛 청풍읍의 풍광은 이제 그림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조선 후기 서화가인 이방운(李昉運)의 『금병산도(錦屛山圖)』를 보면 청풍현 객사와 한벽루에서 풍류를 즐기는 선비, 강물에 떠다니는 나룻배, 강 건너 소 쟁기로 밭 가는 농부, 멀리 기암 준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1872년 청풍부 지방지도를 살펴보면, 북쪽으로 강을 사이에 두고 금병산(錦屛山, 171.2m)이 위치하고 있는데,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금병산은 청풍부 북쪽으로 강 건너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한 떨기의 잔안(孱顔)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아 날렵하게 한벽루의 한 면을 두른다. 매양 마땅히 봄에는 살구꽃 피고 가을에는 단풍이 들면 아름다운 색채가 현란함이 있으니 금장(錦帳)으로 채색한 병풍과 같다. 일명 병풍산(屛風山)이라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병산 앞으로는 청초호(靑草湖)와 석회암 동굴인 풍혈(風穴)과 수혈(水穴)이 있어 예부터 선인이 풍류를 즐겼다고 하나 현재는 청초호, 수혈, 풍혈은 수몰되고 주능선만 남았다.

청풍부의 관아는 강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당시 청풍부에는 객사(客舍) 9칸, 동헌(東軒) 12칸, 아사(衙舍) 30칸이 있었으며, 아사 중에는 치소인 관수당(觀水堂)을 비롯하여 한벽루, 응청각, 명월정, 범영루, 객관의 서헌(西軒)인 매월헌 등이 있었다.

금남루는 청풍부의 관아 일곽으로 출입하는 대문으로서 순조 25년(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趙吉源)이 건립한 것이다. 고종 14년(1877) 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수하였고,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玄仁福)이 전면 보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청풍초등학교의 교문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게 되자 한벽루·금병헌·응청각 등의 관아 건물과 함께 원래의 배치 모습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건물 정면에는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이라고 쓰여져 있는 큰 편액이 있고 배면에는 “금남루(錦南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누각의 이름인 “금남루(錦南樓)”는 금병산(錦屛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서 유래한 것으로 사료된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비교적 큰 건물이다. 누하(下)부분의 기둥은 모두 장초석을 두어 권위적인 외관을 갖추었다. 후면 우측에 계단을 놓아 누 위로 오르게 하였는데, 누상(上)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고 사면에 계자난간으로 돌리고 있다.

김형래 강동대 교수
김형래 강동대 교수

 

관아의 정문으로 사용하였던 “금남루(錦南樓)”는 그다지 화려하고 장식적인 건축은 아니지만 건물의 비례감이나 균형감각은 뛰어나다. 누하와 누상, 그리고 지붕의 비례가 대단히 조화롭고 안정된 건물로서 방어·감시용 기능을 갖는 조선시대 문루 건축의 전형이 아닌가 사료된다. 비록 원래의 위치가 아니어서 주변 환경과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다른 관아 건물과 함께 원래의 배치 모습으로 복원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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