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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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운숙 수필가
  • 승인 2020.03.1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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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최운숙 수필가
최운숙 수필가

 

길거리 어두침침한 동물병원 앞, 한 사내가 항암치료 중인 강아지와 쪼그려 앉아있다. 강아지를 위해 아낌없이 이천만 원의 치료비를 쓴 남자는 얼마 남지 않은 반려견의 생을 안타까워하며 연달아 담배를 피운다. 그래도 준 것보다 받은 게 더 많아 행복하다는 남자, 코로나19가 그 남자 곁을 맴돈다.

주말부부로 생활하고 있는 남편에게 내려왔다. 광주 근교 많은 명소를 두고도 선뜻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괜찮다는 남편 말에 담양 죽녹원으로 향했다. 도로 옆 한켠에 청매화가 봄빛의 옷을 입고 옥빛 웃음을 짓고 있다. 성질 급한 패랭이꽃은 아슬아슬 바람길에 서 있고 시끄러운 세상과는 다르게 자연은 묵묵히 빛을 만들고 있다. 사람보다 먼저 산길을 달려온 새 소리는 사람 마음에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하얗고 검은 부리를 가진 외계인이 되어간다. 맛집을 찾아 긴 줄을 서서 기다리던 국숫집도, 유명한 빵집의 거리도 차갑게 식어버렸다. 지빠귀 한 쌍이 자지러지게 울어댄다.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 뚝배기처럼 양이 많다. 칼칼하고 구수한 멸치국물이 찬 속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가지고 갈 것 없는 가난한 마음의 사람이, 더 바랄 것 없는 사람이 되게 한다. 연둣빛 바람이 잎새를 타고 발등에 내려앉아 애교를 부린다. 국수 한 그릇의 후한 인심이 가난한 나를 든든한 부자로 만든다.

작년 광주 무등산을 갔을 때다. 남편이 교통사고 난 후라 걷기가 불편하여 정상 입구까지 가기로 했다. 산책로 입구까지 올라가자 주차장이 있었고 차량이 여러 대 주차되어 있었다. 별생각 없이 차를 세우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삼분의 일쯤 올라왔을 때 차량을 옮겨 주차하라는 연락이 왔다. 내려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며 기다려 달라고 하자 바로 딱지를 끊겠다는 것이다. 야속한 마음에 “전라도 인심이 좋다고 하던데 엄청 사납군요?”했더니 여기서 인심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며 발끈했다. 그곳은 주차하면 안 되는 곳으로 안내판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남편을 부축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남편을 남겨놓고 급히 내려가 차를 옮기려고 하니 천천히 조심하라고 한다. 주차원의 한마디에 인심 운운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사람마다 하나씩 상처가 있다. 상처를 건드리면 발끈한다. 아마 그곳 사람들은 가장 큰 자랑이 인심일지도 모른다. 그걸 부인했으니 그럴만하다. 사실, 여러 곳 여행을 다녀도 전라도만큼이나 인심이 후하며 음식이 맛깔스러운 곳도 드물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자주 찾는 곳 중 한 곳이 전라도 여행이다. 투박한 사투리와 걸걸한 입담에 적응해가는 중이다.

매일, 몇백 명씩 코로나 확진자가 늘면서 부족한 병원이 문제가 되자 광주가 나섰다. 입원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환자를 광주에서 치료하겠다는 것이다. 광주를 시작으로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태백시의 통반장이 마스크를 나눠주고, 천안과 서산, 진천과 충주가 이어받았다. 재앙처럼 밀려오는 두려움이지만 조금씩 마음이 모이고 있다. 자신의 재산을 털어 생명을 연장해도 코앞의 임종이지만, 행복한 것이 더 많았던 그 남자처럼 우리의 기도는 모아지고 하나가 되고 있다. 인심처럼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서는 마스크 때문에 서툰 마음이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자연보다 더 담대하게 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단단했던 어제의 눈망울들이 다시 빛을 모을 것이다. 그것의 시작은 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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