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앉아
들판에 앉아
  • 정명숙 수필가
  • 승인 2020.03.17 1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
정명숙 수필가

 

허리를 굽히고 봐야 보인다. 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꽃다지와 냉이, 길가에 무더기로 파르라니 핀 앉은뱅이 개불알꽃이 햇볕을 받아 반짝인다. 추위를 이기고 온 기특한 꽃들이다. 겁쟁이처럼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비웃는가. 밭둑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이나 캐고 있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초록이 제 발자국을 넓히고 있어도 마음은 무채색이다. 자유가 억압되는 동시에 희망과 기쁨은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고 있다.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이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무기력해진다. 덩달아 정지된 일상으로 밥상이 빈약해 지는 것은 당연하다. 한동안은 묵은지와 저장 무, 그리고 냉동실에 붙박여 있던 생선들로 밥상을 차렸다. 덕분에 비우기 어렵던 냉장고가 헐렁해져 좋았으나 여러 날 같은 반찬이 올라오면 수저든 손놀림이 느려지는 게 보여 민망하다.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도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집 밥을 먹어야 하는 요즘, 주부들의 어려움도 만만치가 않다. 게다가 역병에는 무슨 음식이 좋고 나쁘다는 정보를 빠르게도 전달해 주어 매번 밥상 차리는 일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얼마 전부터 우리 집에는 콩과 두부, 콩나물을 밥상에 올리지 않는 웃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가장의 절친한 대학교수 친구가 보내 준 메시지 때문에 육류 대신 즐겨 먹던 단백질 식품이 사라졌다. 다른 계절보다 잘 먹어야 하는 봄철 밥상이 균형을 잃었다. 무게가 달라 한쪽이 높이 올라간 시소 갔다. 사다 놓은 두부는 버려야 하고 때마다 서리테 넣어 짓던 밥에서 콩이 사라졌다. 봄에 많이 먹어야 하는 새싹 채소인 콩나물은 눈치를 봐야 한다. 콩으로 만든 된장이나 메줏가루가 들어간 고추장, 간장도 먹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항변에 그것은 발효된 것이니 괜찮다는 답변이다. 황제 밥상을 대하는 사람들이야 걱정이 없겠지만 메시지 하나로 서민 밥상이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되었으니 이보다 난감한 일이 또 있을까. 밥상의 권태기가 온 지 오랜데 그깟 메시지가 뭐라고 밥하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드느냐 따져봐야 의심 없이 믿는 사람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봄이면 옛 추억에 젖어 한두 번 들판으로 나가 나물을 캤었다. 올봄은 상황이 달라졌다. 추억은 멀리 두고 콩나물 대신 봄나물이라도 먹어야 한다. 다행히 밭둑에는 씀바귀가 지천이다. 외지인들은 달큰한 냉이만 캐가고 쓴맛 강한 씀바귀는 내차지가 되었다. 영양소도 풍부하지만, 무엇보다 소화기능을 돕고 열을 풀어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봄 씀바귀는 면역력까지 키워준다고 하니 요즘처럼 불안한 시대에 안성맞춤 나물이다.

밥을 먹는 일은 어떤 행위보다 원초적이다.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을 통했을 때 밥상이 제값을 한다. 따스한 햇볕을 등에 지고 들판에 앉아 상념 없이 나물 캐는 일에 몰두하는 요즘이다. 무기력해지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일거리가 없다. 내 발걸음 소리에 움츠러들 씀바귀엔 몹시 미안한 일이나 불편한 산골살이가 이처럼 다행스러울 수가 없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