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담그는 날에
장 담그는 날에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0.03.11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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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장을 담근다. 예부터 이 날은 손 없는 날을 택해야 하는 귀한 행사였다. 휴일 중에 2월의 말날이 겹치는 날을 살펴 잡은 날이다. 바람도 잠잠하니 장을 담기에 좋아 날씨가 한몫한다. 오늘의 이 일을 주관하는 사람은 그이다. 김장을 할 때나 장을 담그는 간을 맞추는 사람으로 자칭 간잡이다.

아침부터 서둘러 준비한다. 밖에서는 짚불을 태워 항아리를 소독하고 있다. 내가 맡은 일이라곤 메주를 솔로 깨끗하게 닦아서 준비하고 옆에서 잔심부름하면 된다. 항아리에 메주를 가지런히 채운다. 3년째 담는 장이지만 담을 때마다 마음이 새롭기만 하다.

이때 가장 중요한 건 소금물의 염도를 맞추는 일이다. 장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염도가 17-18이면 적당하다. 염도계가 없어 계란을 띄워보아 500원짜리 동전 크기면 된다. 물에 소금을 넣어가면서 한참 동안 간을 맞추느라 계란을 띄워보던 그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무래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소금을 자꾸 더 넣어도 계란은 계속 크기가 똑같다고 군소리다. 그럴 리가 있느냐며 핀잔을 그에게로 던진다. 그러면 괜히 계란을 띄워보라는 말이 있겠느냐고 말이다. 빨리 끝내고 싶은데 질질 끌며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오백 원 크기만 한 게 염도가 제대로 된 듯 보인다. 아무 문제가 없으니 그만 마무리를 하자고 채근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있다.

그이는 뭔가 찜찜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는다. 다른 계란을 가져오라는 말에 가져다 또 넣어보아도 그 크기다. 다시 새로 떠온 물에 담가보아도 똑같다. 어! 이상하다. 맹물에는 가라앉아야 할 계란이 무슨 일인지 싶다. 분명 껍질을 깨어 확인했을 때 노른자가 흐트러지지 않고 싱싱했건만 도무지 어쩐 영문인지 모를 노릇이다. 생각해보건대 냉장고에 둔 지 꽤 된듯하다.

큰소리를 내던 내 훈수는 게 눈 감추듯 자취를 감추었다. 성급히 사온 새 계란을 맹물에 띄우니 바닥에 가라앉는다. 소금물에는 둥둥 떠올라 아직 오백원 크기보다 작은 모양이다. 조금 더 염도를 맞추어 소금물을 항아리에 부었다. 맨 위에는 숯과 고추, 대추를 올려 마무리했다. 이제 장뜨기를 하기까지는 60일이 걸린다.

말날에 장을 담그는 이유는 말이 메주콩을 가장 잘 먹어서 이날에 장을 담그면 맛있다고 한다. 또한 말날은 귀신이 못 돌아다닌다고 하는 횡액이 끼지 않은 좋은 날이기 때문이다. 택일을 할 만큼 집안의 큰일임을 알 수가 있다. 나로 인해 혼선은 있었지만, 비로소 해내니 뿌듯하다.

그이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이 앞에서 선무당일 때가 종종 있다. 나이가 같은데도 더 어른인 인생선배 같다. 오늘도 한 수 배운다. 나였다면 어땠을까. 어느 정도의 소금을 풀고 계란을 띄워서 본대로 판단하여 그냥 넘겼을 것이다. 아둔하여 계란에 문제가 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반생을 넘긴 나이에도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세상일을 그이에게 배우는 중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처럼 어설픈 훈수로 일 년 농사를 망칠 뻔했다. 금줄을 두른 장독대 앞에 합장한 채 선다. 장을 만드는 일은 기다림이다. 콩이 과정을 거쳐 단단한 메주가 되기까지, 메주가 소금물에 담겨져 된장이 되기까지도 시간이 필요하다. 바람과 햇볕. 그리고 시간이 장을 익힐 것이다. 장이 잘 만들어지면 곰팡이가 피워내는 꽃. 바위꽃이 피기를 기원하는 내 마음도 함께 녹아들었으면 싶다.

30년을 함께 한 우리 부부는 얼마만큼 곰삭혀졌을까. 희로애락(喜怒哀)을 같이 한 시간은 어쩌면 서로를 혹초해가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옆을 곁눈질하다가 그의 얼굴에서 내 모습을 본다. 언제 이렇게 닮아가고 있었을까. 참 많이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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