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지명 '사직동'의 유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지명 '사직동'의 유래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0.03.0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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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공무원의 신분은 국가직과 지방직으로 나눈다. 우리나라 교육을 담당하는 공무원 중 교사는 국가직이고, 교육전문직원이라는 장학사와 행정직은 지방직이다. 필자는 국가직 교사로 교감으로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전에는 지방직인 장학사로 7년여 근무한 경험이 있다.

장학사로 근무할 당시 많은 업무 가운데 지금도 뿌듯한 보람과 긍지로 삼는 일이 바로 역사교육 관련 자료를 개발해 학교에 보급한 일이다. 학생들의 정체성 함양을 위해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시리즈로 발간해 학교에 보급하여 체험활동 자료로 활용하도록 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다.

사실 많은 사람은 경주의 석가탑과 다보탑은 알면서 정작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의 역사적 유적이나 유물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예컨대 `탑동'이라는 지명이 있으면 반드시 그 지역에 탑이 있는데 많은 사람은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 청주의 탑동에도 고려시대 석탑이 있는데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조차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 주요 도시에 가장 많은 지명이 사직동이다. 청주의 사직동은 본래 사창리에 속했는데 1963년 사창리 일부를 분할하여 사직동이라 이름하였다. 사직동의 사직은 이곳에 있었던 사직단(社稷壇)에서 유래했다. 사직단은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제를 올리던 곳인데, 지금의 사직동 청주시립미술관 뒤쪽 공원에 있었다. 옛날에는 매년 2월과 8월 청주목사가 제주가 되어 유교식으로 사직단에서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제사를 폐지하면서 안타깝게도 사직단도 허물어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그 자리에는 1955년 세운 충혼탑이 있으며 입구 한쪽에 천지신단이라는 작은 제단과 사직사거리에 사직단 표석을 최근에 만들어 놓은 것만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사직단은 서울의 종묘와 함께 이해를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종묘와 사직이 있었다. 종묘는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인데, 역대 왕들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곳이다. 아울러 사직단은 토지신인 사(社)와 곡물신인 직(稷)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종묘와 사직단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제례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하고, 농경이 가장 중요한 산업 기반이었던 조선시대에는 왕실에 제사를 지내는 종묘와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직을 잘 지키는 일이야말로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종묘사직'을 잘 지킨다는 말은 곧 나라를 잘 지키고 다스려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런 종묘와 사직을 지방에서는 3단 1묘라고 해서 관아의 동쪽에는 하늘에 제를 지내는 성황단(청주에도 당산이 있다), 서쪽에는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 북쪽에는 길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여단을 두게 되어 있었고 종묘 대신 문묘(향교)를 두었던 것이다.

지금은 비록 사직단 대신 충혼탑이 들어서 있고 작은 표지석만이 세워져 있지만 사직동 사거리를 수없이 오고 가면서 조상의 삶과 얼을 느껴 볼 수 있길 바란다. 그것이 자신의 뿌리를 아는 것이고 지역과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정체성을 갖는 작은 시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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