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 성운(成運)의 인품과 위엄이 서린 학재(學齋), 보은 ‘모현암’
대곡 성운(成運)의 인품과 위엄이 서린 학재(學齋), 보은 ‘모현암’
  • 김형래 강동대교수
  • 승인 2020.03.08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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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교수
김형래 강동대교수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은 조선 중기 이후 각종 사화와 당쟁 등의 영향으로 한양 중심에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네 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지방으로 낙향한 선비들은 세속을 벗어난 한적한 곳에 은거하면서 자기 수양을 하는 것을 삶의 중요한 과정으로 삼았다. 이들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이상적인 장소를 찾았으며 거기에 작은 집을 짓고 성리학을 통한 삶의 바른 태도를 탐구하고자 했다.

16세기 보은지역도 보은 출신으로 호서사림(湖西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지는 김정(金淨)을 비롯해 최수성, 구수복 등에 의해 지역의 문운(文運)이 크게 일고 사림(士林)문화의 싹이 트게 되었다. 16세기 후반에는 성운(成運)·성제원(成悌元) 등에 의해 보은지역 사림의 전통이 이어져 많은 인재가 보은에 몰려들었다.

성운(1497~1579)은 원래 이곳 출신이 아니라 연산군대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1545년(명종 1) 형 성우(成遇)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입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처향(妻鄕)인 보은 북실 종곡(鐘谷)에 내려와 은거했다.

보은에 와서 산천과 경치를 사랑해 가야금과 책과 술과 시를 벗 삼아, 오직 의리가 있는 사람과 어울리니 사람들이 모두 진솔한 학자라 추앙했다. 왕의 부름에도 끝내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선조(宣祖)가 즉위해 인재를 등용하고자 특별한 부름을 했을 때 경상도의 이항과 충청도의 성운이 그 대상이었으니, 당시 충청도를 대표하는 학자였던 셈이다.

성운이 북실로 낙향하였다는 소문이 나자 남명 조식(曺植), 화담 서경덕(徐敬德), 토정 이지함(李之菡) 등이 찾아와 학문을 교류하는 등 당대 유명한 석학들이 종곡리로 모여들었다. 특히, 남명 조식은 대곡의 평생 지기이자,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한 벗이었다. 또한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전국을 누비며 여러 일화를 남긴 시인 백호 임제(林悌)는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동고 이준경(李浚慶)은 `별은 종곡에 떨어졌다'고 한탄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모현암(慕賢庵)은 성운이 낙향해 은거하며 공부했던 학재(學齋)로, 보은읍 종곡리 대곡(大谷)에 위치하고 있다. 종곡리는 마을 뒷산이 북처럼 생겨서 `북산'이라 하였고, 산 아래 마을은 `북실'또는 `종곡(鐘谷)'이라 하였다.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

종곡리로 낙향한 성운은 처가의 도움으로 건물을 지어 `사암(斯庵)'이라 하고 젊은이들을 가르쳤으며, 이곳 지명을 따라 호로 삼았다. 그의 사후에는 `대곡재(大谷齋)'라고 하였다가, 1887년(고종 24)에 후학들이 개축하고 그를 사모하여 `모현암'이라고 이름 지었다. 현판은 헌종 때 좌의정을 지낸 입재 송근수(宋近洙)의 글씨이다.

현재의 `모현암'은 본채와 부속채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인 모현암은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깊은 골짜기 산자락에 위치하는 만큼 비교적 경사가 심한 터를 3단으로 깎아 대지를 조성하여 전망이 좋다. 건물은 사치를 부리지 않은 검소한 모습으로 포작(包作)이 없는 민도리집 형식이다.

그러나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위엄이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다. 기둥이나 보, 서까래 등 사용 목부재가 견실하고 세부에서 고식의 기법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청빈과 절개를 행동규범으로 삼지만 고고한 인품에서 풍기는 위엄이 가득한 선비의 모습이 이 건물의 분위기에서 잘 어울린다.

모현암은 현재는 사찰 암자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유학사에서 기호학파와 호서사림의 전통을 이어온 역사적 장소로서 문화재로 지정 보존해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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