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사 가는 길
안심사 가는 길
  • 김규섭 청주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0.03.0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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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규섭 청주 문화산업팀장
김규섭 청주 문화산업팀장

 

겨울비가 내린다. 비를 맞으며 산길을 걷는 것은 처량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산길이 절을 찾아가는 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목들 사이의 텅 빈 공간을 뚫고 사선을 그으며 내리는 빗속을 걷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구름은 바람의 얼굴이 되고 앞산은 뒷산의 배경이 된다. 나목이 늘어선 숲에는 왠지 모를 고독이 있고 곡선의 길 위에는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있다.

남이면 사동리, 구룡산 자락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절 안심사. 야트막한 산속에 천 년 고찰을 찾아가는 길이지만 거칠지 않아서 좋다. 이 길 위에는 상처 난 마음을 보듬어 주는 자연의 손길이 있고, 깊고 그윽한 대지의 얼굴이 있다. 골짜기마다 마을이 품고 있는 풍경들이 한없이 너그럽다. 축축한 마음 한 자락 널어 말리기에는 이보다 좋은 길도 없을 성싶다.

산길을 걸을 때에는 삼보일배의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 그래야, 사색의 안목과 생각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 기울이고 불어오는 바람과 대화도 하면서 천천히 걷는다. `서두르지 마라, 한번 가는 인생길인데…' 지나가는 바람이 속삭여 준다.

중국의 작가 위화는 소설 `인생'에서 “인생은 무거운 등짐을 지고 머나먼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눈물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조금은 부족해도 만족할 줄 아는 삶이 행복한 삶 아닐까. 목표보다는 과정에 충실한 삶을 살고 싶다. 물이 흐르듯 순리를 따라서 살고 싶다.

770년 왕의 행차, 삼국통일의 힘찬 기운이 사라지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귀족들의 암투가 치열하던 시절. 신라 혜공왕은 왕궁(지금의 경주)을 비우고 오랜 기간 청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775년(혜공왕11년) 이곳에 안심사를 지었다. 그분도 이 길을 걸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부처님의 공덕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왕권을 회복하고 옛 영화를 되찾는 그런 세상. 안팎으로 위기를 맞은 왕에게 부처님은 구원의 손길이자 닮고 싶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무명의 서예가도 대웅전 현판에 명문을 남기러 이 길을 걸었고, 화승(畵僧) 신겸도 괘불 영산회상도를 그리러 이 길을 걸었다.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예술혼이 머물던 길 위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지금 나는 그 길을 밟으며 또 다른 내 길을 걸어가고 있다.

길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해탈한 스님의 염불 소리로도 들리고 청정한 자연의 독경소리로도 들린다. 움푹 파인 웅덩이에 떨어지는 빗물 소리는 아픈 마음을 파고드는 낙숫물 소리로도 들린다.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었을 선인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니 어느새 절 입구다. 보통 절을 들어서려면 일주문을 지나야 하는데 이곳에는 둘러친 담장도 절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도 없다. `참 좋은 인연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 하나와 높다랗게 자리 잡고 서 있는 두 그루의 노송이 오고 가는 길손을 맞이할 뿐이다. 솔솔 불어오는 산바람을 따라 빗길을 걸으니 끊어질 듯 이어지는 풍경소리가 나지막이 들린다. 구룡산 능선 위로 흰 구름 둥실 흘러가고 있는데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불심에 기대어 마음을 털고 스님이 베푸는 차향(茶香) 속에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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