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 전현주 수필가
  • 승인 2020.03.0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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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전현주 수필가
전현주 수필가

 

거실에 산수유가 활짝 피었다. 일주일 전쯤 가지치기를 하고 마당을 치우다가 잔가지를 한 움큼 주워 항아리에 꽂아놓았더니 이렇게 깜짝 선물을 내놓는다. 막대기 같은 나뭇가지를 거실로 들여올 때만 해도 저리 화사하게 꽃을 피우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꽃에서 빛이 난다. 아침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꽃잎을 간지럽히면 나는 마치 봄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잠시 나른해진다. 그러다가 뉴스 소리에 흠칫하며 이내 마음이 어두워진다.

아주 오래전부터 겨울이면 연례행사처럼 웃자란 개나리를 꺾어 집 안에 놓아두곤 했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수시로 꽃을 들여다봤던 것 같다. 아무래도 해가 짧은 겨울에 실내에서 피다 보니 개나리는 색도 모양도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연노랑 색으로 꽃잎이 더러는 구겨져 피었는데도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맘때에 봄을 앞당겨 느끼기에는 충분했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처지가 어떤지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물을 끌어올려 꽃망울을 틔우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짠하면서도 덩달아 생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식이었던가. 참으로 볼품없는 꽃다발을 받았다. 난방시설이 열악한 시절이라 그랬겠지만, 요즘은 흔하디 흔한 안개꽃도 없었고 카네이션 몇 송이를 빼고는 눈에 확 띄게 예쁜 꽃도 없었다. 초록색 사철나무 이파리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동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눈을 맞은 것처럼 스티로폼 부스러기를 하얗게 뒤집어쓴 마른 나뭇가지가 있었다. 죽은 나무 같았다. 왠지 다른 꽃들과는 안 어울리는 그 나무가 도대체 무슨 나무인지 몹시 궁금했다. 나는 꽃다발을 꽃병에 통째로 꽂아 지켜보기로 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나무는 살아있었다. 따뜻한 방에서 나뭇가지 끝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더니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통통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꽃이 피었는데 진달래였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였다면 어차피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을 것이니 주위에 흔한 아무 나무나 꺾어다가 만들었을 텐데 왜 굳이 진달래로 했을까. 나처럼 꽃병에 꽂아놓지 않았더라면 꽃을 피울 기회도 없이 버려질 나뭇가지인데 힘들게 귀한 진달래를 구해서 만들었을까. 이 일은 두고두고 내 마음에 남아 내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보이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자. 보이지 않아도 좋은 것을 주자.'하며 나를 움직였다.

올해는 예년보다 꽃들이 일찍 망울을 터뜨릴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다가오는 봄은 예전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너무도 힘든 시기다.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하고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리 반가워도 손을 맞잡지 못한다. 서로 멀찍이 떨어져 간격을 유지하며 요즘 벌어지고 있는 안갯속 같은 상황을 근심한다. 연일 늘어가는 확진자와 사망자 수에 귀를 기울이며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이 위기상황이 언제 끝날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그동안 별 감동 없이 지내왔던 소소한 일상생활들이 사무치게 그립다.

외출 준비를 하며 끝으로 숙연하게 마스크를 쓴다. 거울 속 얼굴의 반이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마스크 안에서 미소를 지어본다. 보이지 않아도 애써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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