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거진천의 역설
생거진천의 역설
  • 박종선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 승인 2020.02.2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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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박종선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박종선 충북도문화재연구원 기획연구팀장

 

최근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코로나19'는 단순히 신종 바이러스에 대한 의학적인 위협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혐오'와 `편견'이라는 더 큰 바이러스로 피해를 낳고 있다. 특정 지역을 향한 무분별한 혐오와 배척, 섣부른 판단과 거리낌 없는 발언들로 인한 상처들은 바이러스보다 더 독하게 우리들의 마음속에 전파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코로나19의 근원지라고 알려진 중국 우한에서 온 교민들을 2주라는 긴 시간 동안 받아준 진천과 아산의 시민들이 있어 이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나갈 힘과 용기를 얻는 것만 같다. 지난 주말 진천에서는 우한 교민의 퇴소식에 많은 인근 주민들이 나와 처음에 힘든 시간을 보낸 그들에게 응원과 축하의 메시지가 담긴 팻말을 들고 배웅하였다. 그렇게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 다시 조용한 일상이 찾아왔다.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살아서는 진천 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 땅이 좋다는 뜻이다. `살기에 좋은 땅'이라는 브랜딩은 현재까지 진천을 대표하는 수식어로 쓰이고 있다. 실제로 진천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유적인 김유신 장군 태실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헤이그 특사의 주인공인 이상설 선생이 태어나 자란 곳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진천에 총 44건의 문화재가 지정되어 있는데, 이 중 묘소만 9건이고 묘지나 지석 등 장례와 관련된 유물도 2건이나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충북에 지정된 808건의 문화재 중 묘소는 36건으로 4.4%를 차지하는데 반해서, 진천은 묘소가 20%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충북 전체를 봤을 때도 25%를 차지하고 있어 확실히 묘소가 많이 지정되어 있는 편이다. 앞서 `생거진천' 살아서는 진천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묘소가 많이 남아 있는 면이 흥미롭다. 추측해 보건데 살기 좋은 곳이라 많은 인물이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던가 후손들이 이곳에 터를 잡으며 조상이 묘를 대거 이장해 왔을 가능성이 크다. 전자에 해당되는 대표적인 경우가 조선 전기 문종 때 좌의정을 지낸 남지의 묘소로 말년에 낙향하여 병사한 후 진천에 묻히게 되었고,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는 송강 정철로 그의 후손 정포가 묘를 이장하여 진천에 묻고 그를 배향하는 정송강사를 짓게 되었다.

남지와 정철 이외에도 고려 인종 때의 공신이자 진천송씨의 중시조인 송인을 비롯하여, 조선의 개국공신인 이거이와 그의 부친인 이정의 묘소, 김홍도의 스승이자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인 강세황 묘소, 임진왜란 때인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영남 장군의 묘소까지 많은 인물들이 진천에 남아 있다.

우한교민 173명이 머물다 떠나간 진천은 요즘 한마디로 `생거진천' 이름값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생거진천으로 불리게 된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살기 좋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 곳에 묻히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문화재로 남아 명확한 증거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진천에 묘소 이외에도 다양한 문화재가 있어 우리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지만 한 번쯤은 생거진천의 증거들이 남아있는 묘소들을 테마로 답사를 떠나 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우한 교민,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 우리가 찾아갈 이유를 굳이 하나 덧붙이자면 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바이러스를 이길 힘과 용기, 따뜻함을 안겨준 진천에 대한 작은 보답이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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