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가다 본 것(上所見)
길 가다 본 것(上所見)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0.02.1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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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길은 두 종류가 있다.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저절로 생긴 길이 있고, 거꾸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만든 길도 있다. 어느 경우든 불특정의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한 길을 거닐다 보면, 모르는 많은 사람을 스치게 되어 있고, 뜻하지 않은 일을 목격하게도 된다.

조선(朝鮮)의 시인 강세황(姜世晃)은 그림에도 능했던 만큼 길 가다가 보는 눈도 남달랐을 것이다.


길 가다가(路上所見)

凌波羅襪去翩翩 (능파나말거편편) 비단 버선 사뿐히 걸어
一入重門便杳然(일입중문변묘연) 중문 한번 들어가더니 행방이 묘연해졌네
惟有多情殘雪在(유유다정잔설재) 그래도 정이 많았는지 녹지 않은 눈이 있어
屐痕留印短墻邊(구흔유인단장변) 낮은 담장가에 발자국이 찍혀 있네

시인은 길을 걷고 있었다. 시인의 눈에 많은 것이 들어왔겠지만, 인상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수려한 풍광이나 기괴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서 시인은 예사롭지 않은 것을 포착하였다.

우선 차림새가 눈에 띄었다. 다른 것도 아닌, 발에 신는 버선이 눈에 들어왔다. 비단 버선은 여간 귀한 게 아니라서 길 가다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른 생김새나 차림새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발에 신은 버선 하나로 여인의 미모와 기품을 읽어 낸 것이다. 어여쁘고 기품 있는 여인이 들어간 곳은 으리으리한 대갓집에나 있는 중문이었다. 그 여인이 기거할 만한 저택이었다. 한 번 들어간 여인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시인은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는데, 그나마 남겨 진 게 있어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으니, 담장 가의 아직 녹지 않은 눈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이 그것이다. 눈이 다 녹고 사라졌더라면 아마도 종적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러면 그녀의 잔상은 곧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인에게 이 순간 고마운 것은 눈이었다. 눈에 남은 발자국을 보고 그녀를 계속 떠올리고, 마침 나지막한 담장인지라, 그녀가 있을 집 안을 끼웃거리는 행운까지 잡게 되었다. 시인에게는 참으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길을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것이 부지기수겠지만, 정작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고 천천히 뜯어 보면, 무엇이든 흥미로울 수 있다. 하물며 아름다운 풍광이나 미모의 여인을 만나는 것은 여간 행운이 아닐 수 없으리라. 추운 겨울이라고 집 안에만 머물 게 아니고, 동네 고샅이라도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눈 위에 남아 있는 여인의 발자국을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생기는 솟아날 수도 있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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