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자
빚진 자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20.02.1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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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병원이다. 환자인 듯한 대부분 사람들은 나이가 많고 거동이 불편해 보인다. 곁에 있는 보호자는 거의 자식들인 듯하다. 대형병원이기도 하지만 구석구석마다 진료를 기다리느라 분위기마저 조금씩 달랐다. 소란함보다는 가라앉은 풍경들이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병원의 기운은 잠깐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다 주었다.

나도 남편의 지병 때문에 동행중이다. 지방에 살다 보니 진료시간을 맞추느라 새벽부터 나서야 한다. 이렇게 병원을 오가는 일은 하루를 보낼 정도로 시간이 필요하다. 그나마 다행은 기대했던 대로 많이 좋아졌다는 의사의 한마디가 묶였던 근심을 풀고 돌아오게 만든다. 오늘날의 발전된 의료혜택을 누리는 것조차 감사할 뿐이다.

유독 눈길이 가는 쪽은 걸음조차 어둔한 분들이다. 그래도 자식들의 부축을 받고 있는 모습이 한참이나 우러러 보였다. 그런 경우가 생기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어린애처럼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병원에 왔다는 사실이 흐뭇한 광경이었다. 갑자기 나 자신이 빚쟁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들이 모습이 떠올라서다.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나는 저렇게 옆에서 부축하며 병원에 다닌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핑계는 아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지나온 거리가 몇 겹씩 희미하게 몰려와서 가슴팍을 휘 젖는다. 정신없이 살았고 많은 형제 틈에서 책임감도 크게 갖지 않았던 불효한 삶이 분명하다. 한참의 세월이 지난 다음,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약해지는 시기에 이르러서야 그때의 상황을 이해하고 돌이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죄스럽기 그지없다.

마음의 빚을 실감한다. 사사건건 많은 빚을 졌으면서도 갚기에는 너무나 인색했던 나 자신이 병원복도에 기울어진 모습으로 앉아 있다. 연습이 없는 인생의 무대 위에서 초라한 후회만 고개를 들 뿐이다. 손짓 하나, 몸짓 하나마저 어떤 변명도 구실을 못할 만큼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지금 알게 된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어느 시인의 잠언이 뇌리를 스치고 있다.

휴대폰이 울린다. 진료 잘 받았느냐는 아들의 물음이다. 그동안 남편의 치료과정에서 아들의 도움이 많았다는 것은 주변에서도 익히 안다.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몰려왔다. 나는 부모님께 많은 빚을 지고 갚지 못했는데 내 자식에게는 틈틈이 돌려받는 그 무언가가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짧은 전화 한 통, 잠깐이라도 보여주는 얼굴이 어떤 특효약보다도 낫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살다 보면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모든 것이 원만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미세한 부분들이 감정을 오르내리게 하는 일들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은 내가 빚진 자, 라는 것이다. 그 빚을 탕감 받지도 못했으면서 소소하게나마 자식으로부터 오히려 받는 것을 좋아했던 순간이 있지는 않았던가. 후회한들 무엇 하리.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미완의 자화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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