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그리고 시작
졸업, 그리고 시작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0.02.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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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졸업식이 끝났다. 연둣빛 여린 새싹 같던 아이들이 하루하루 시간을 쌓고 햇볕 좋은 곳의 나무처럼 튼튼하게 자라 어느새 생애 첫 졸업을 맞이하는 날이건만 졸업식은 간소하게 일사천리로 끝이 났다. 품 안에 알록달록 꽃다발을 안은 아이들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하나둘씩 식장을 빠져나간다. 머리와 옷차림으로 한껏 멋을 낸 아이들의 얼굴마다 하얀 마스크가 도드라진다. 아이 대신 상장과 선물을 들고 보폭을 맞추는 부모님들의 얼굴에도 마스크가 떨어지지 않는다. 작년 졸업식과는 사뭇 다른 이색적인 풍경이다. 신종 독감 `코로나바이러스'확산의 우려로 취소될 뻔한 행사였다.

환하게 열린 유치원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에게도 너희와 같은 졸업의 시절이 있었지'해 본다. 나의 첫 졸업은 어느 시골 초등학교 강당이었다. 식의 시작은 엄숙함이었으나 마지막 졸업가를 부를 때는 여기저기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중에는 노랫소리보다 흐느끼는 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웠다. 눈물로 기억되는 그날의 졸업식을 중·고교에서는 절대 볼 수가 없었다.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졸업은 감성보다 이성이었다.

가장 아픈 졸업은 사랑하는 엄마 손맛과의 안녕이었다. 몇 해 전부터 엄마는 당신의 생에 가장 큰 즐거움이었던 요리로부터 손을 놓으셨다. 소소하고 단순한 일상마저도 가져가 버린 치매라는 병. 그것은 엄마를 아주 낯설게도, 나를 힘들게도 하지만 더없이 슬픈 건 스스로를 잊게 하고 수많은 시간을 잃어버린 당신 자신이 아닐는지.

엄마의 손맛은 투박하고 단조로웠지만 깊고 담백했다. 특히 만두와 메밀전병 요리가 그랬다. 가을에 수확한 청갓과 홍갓을 소금에 절여 항아리에 쟁여 놓고 겨우내 먹었는데, 마당 한 귀퉁이 땅속 깊은 곳에서 익어가던 갓은 만두소와 메밀전병 속을 채워 깊은맛을 냈다. 금방 꺼낸 절인 갓을 도마에 놓고 잘게 다져 속재료를 만들면 알싸한 갓 향이 투박하고 단조로운 맛을 깊고 풍미가 돋는 음식으로 탈바꿈시켰다. 동지섣달 긴 밤을 짧게도, 따뜻하게도 해 준 일등공신이었다. 한겨울 긴 긴 해를 벗 삼아 온종일 앉아서 만두를 빚고 메밀전병을 부치던 엄마의 뒷모습, 누군가의 말처럼 엄마음식 맛의 절반은 추억이었다.

요즘은 일상의 졸업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전부터는 높은 구두굽과 졸업을 했다. 그리고 웬만하면 단화나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불면 날아갈까 뜰 안의 화초처럼 키워내던 자식으로부터도 이젠 마음을 졸업했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날고 싶어 하는 아이를 언제까지 손안에 꼭 쥐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저 언제라도 들려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두면 될 일이다.

졸업은 하나의 과정을 끝내는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통로이다. 늦었지만, 엄마의 손맛을 이제는 내가 따라가 보려 한다. 당신의 기억을 더듬어 질문하고 메모하고 직접 불 앞에 서서 하나하나 시작해 볼 참이다. 운동화는 구두보다 편하니 더 많은 걸음을 걷게 될 것이고, 아이는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보면 될 듯하다. 가끔 인생을 물어오면 세상을 조금 더 산 선배로서 작은 조언만 덧붙여 마음을 나누리라. 그것부터 시작해 볼 것이다. 그나저나 사랑스런 우리 아이들의 미소를 숨겨버린 이 마스크들로부터는 언제쯤 졸업을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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