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된 선례 만들기 걱정된다
그릇된 선례 만들기 걱정된다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02.0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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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2000년 5월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국회가 의정활동과 관련해 서류(사진·영상물 포함) 제출을 요구할 경우 국가기관이 반드시 응하도록 강제한 법률이다. 국회의 행정부 감시기능과 국민의 알 권리를 강화하자는 것이 입법 취지이다. 법은 요구받은 자료가 직무상 비밀에 속하더라도 거부할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다른 법률에도 불구하고 누구든지 따라야 한다'고 규정해 다른 법과 상충할 경우 우선권도 보장한다. 단 자료의 공개가 국가안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는 예외로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 때부터는 검찰의 공소장까지 포함돼 지금까지 법무부는 국회가 요구하면 즉각 공소장 전문을 제출해 왔다. 나라가 반쪽이 날 정도의 논란을 초래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가족의 공소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연 잘못된 관행의 시발주자로 지목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노무현의 정치적 후예를 자처하는 현 정권의 법무부장관에 의해서 말이다. 추미애 법무장관은 지난 지방선거 당시 울산시장 선거개입 혐의로 기소된 청와대 민정비서관 등 13명에 대한 공소장의 국회 제출을 거부하며 “잘못된 관행이 그동안 되풀이돼왔다”고 주장했다.

누가 봐도 이 공소장이 국가안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법무부는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위축되고 사건 관계인의 명예 및 사생활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이유를 달았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기소 단계에서 공소장이 공개될 경우 피의자가 불리해지는 것은 맞다. 여론재판으로 불리한 입지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경우도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국회가 요구한 공소장이 대부분 제출된 것은 피의자의 개인적 불이익보다 재판공개의 원칙과 국민의 알 권리라는 공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의심 없이 용인돼 왔음을 방증한다.

추 장관이 내부 반대를 무릅쓴 흔적도 보인다. 그는 국회의 요구에 6일이나 침묵하다 `노'라고 답했다. 일부 언론은 몇몇 간부들이 `거부한 전례가 없다'며 반대했으나 장관이 묵살했다고 보도했다. 추 장관이 장고 끝에 한 선택은 `소탐대실'이 돼버렸다. 공소장은 바로 한 신문에 전문 그대로 공개돼 버렸다. 법무부의 거부 의도에 대한 구구한 추측들이 나돌며 세간의 의혹과 의심만 깊어졌다. 추 장관은 강성 이미지를 재차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공개된 공소장 내용은 충격적이다. 당시 민주당 울산시장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피의자들이 조직적이고, 집요하게 불·탈법을 자행했다는 검찰의 주장이 일목요연하게 담겨 있다. 정의와 공정을 합창해온 지금 정권에서 벌어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두려울 정도다. 그래서 청와대 주장대로 이 공소장이 검찰이 일방적으로 쓴 소설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그 판단은 청와대나 법무부가 아니라 법원의 몫이다. 두 기관이 더 이상의 석연찮은 처신으로 재판개입 의혹까지 사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추 장관은 한국당이 `학살'로 부른 일방적 검찰 인사를 단행하며 `검찰 인사와 감독권은 엄연히 법무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철권을 휘둘렀던 5공의 전두환조차도 대통령 재임 중 동생과 장인을 구속하는 검찰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통령의 수족에 불과했을 법무장관이 검찰 지휘·인사권이 없어서 수사를 관망만 했겠는가. “아버지가 잘못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부인의 압박과 읍소에 시달리면서도 끙끙 앓기만 한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법무장관이 미래 어느 정권이 전례로 들어 악용할지도 모를 그릇된 선례들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영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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