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마을
눈 내린 마을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0.02.03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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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겨울에 눈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까? 나뭇잎이 떠난 자리에 꽃이 피어난 꼴이니, 전화위복도 이런 전화위복이 없다. 세상의 온갖 누추함도 일시적으로나마 가리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눈은 마법의 커튼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온 세상이 하얗게 치장하고 나뭇가지마다 하얀 꽃이 피었으니, 이보다 아름다운 모습은 세상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고려(高麗)의 시인 이숭인(李崇仁)은 눈 내린 겨울 정취에 흠뻑 취하였다.

제목을 잃음(失題)

 

雪壓村村樹(설압촌촌수) 눈이 내려 이 마을 저 마을의 나무들을 누르니
枝枝總作花(지지총작화) 가지마다 모두 꽃이 피었네
山童爭報道(산동쟁보도) 산 아이들이 다투어 알리기를
嘉景酒堪賒(가경주감사) 좋은 구경거리가 왔으니 술 외상이라도 할 만하다 하네

시인은 눈이 내려 쌓인 어느 산 골짜기에 기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골짜기에는 여러 마을이 산재해 있었는데, 시인의 발걸음이 닿는 마을마다 눈이 나무들을 누르고 있었다. 그래서 가지란 가지에는 모두 때아닌 꽃이 만발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눈꽃이 그것이다.

시인이 돌아다닌 산 골짜기 풍광은 눈이 연출한 장관 그 자체였다. 시인은 과연 이 장관을 어떻게 그려 냈을까? 시인이 직접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은 감흥을 떨어뜨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시인이 택한 방법은 아이들의 입을 통한 간접 화법이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니만큼,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할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눈의 장관을 그려 낼 만한 표현력은 안 되기 때문에 그저 좋은 구경거리라고 말한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 그 뒤에 곁들인 말이 걸작이다. 오늘 눈 구경이라는 큰 횡재를 했으니, 외상 술이라도 마셔야 한다니 말이다. 술 맛을 알 리 없는 어린 아이의 말이라고 믿기 어렵지만, 얼마나 장관이었으면 어린 아이가 다 이런 말을 했을까? 눈의 장관을 전달하는 시인의 솜씨가 참으로 절묘하다.

겨울은 눈이 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살 만한 계절이다. 추위에 웅크려 있지만 말고, 눈이 내린 산야를 찾아 나서면 춘삼월 꽃이나 가을 단풍과는 차원이 다른 자연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이 주는 즐거움은 거저 오지 않는다. 발품을 팔아 찾아 나서는 사람만이 그 즐거움을 맛볼 수 있으리라.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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