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암에 올라
사성암에 올라
  • 김규섭 청주시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0.01.3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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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김규섭 청주시 문화산업팀장
김규섭 청주시 문화산업팀장

 

순박한 누이의 미소를 닮은 섬진강 자락 한 모퉁이에 나지막이 서 있는 오산(鰲山). 자라 등에 업힌 듯 범상치 않은 산세 속에 암자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사성암이다. 마을에서 암자까지 가는 길은 버스로 십여 분, 성과 속의 세계가 얼굴을 맞대고 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막다른 길, 기암절벽의 속살처럼 벼랑 끝에 전각들이 절묘하게 매달려 있다. 깨달음의 길이란 이렇듯 좁고 험한 길인가. 가파른 길을 오르고 또 오르며 세속에 찌들었던 마음을 비운다.

벼랑 끝에 바위를 뚫고 나온 듯 위태롭게 서 있는 약사전. 전각 주위를 둘러싼 바위들의 기세가 대단하다. 누가 세웠을까. 지극한 불심이 아니었던들 가능키나 한 일이었을까. 돌계단을 지나 약사전에 오르니 마애불이 눈에 들어온다. 구례 사람들은 신라고승 원효가 도력을 발휘해서 손톱으로 그려 넣은 것이라고 했다. 약사불은 병을 고쳐주는 부처님이라는데, 삼국시대 오랜 전쟁으로 살상과 원한에 고통받는 중생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손가락 뼈마디가 드러나는 아픔을 견디며 이 바위에 마애불을 그려 넣은 걸까. 원효의 도력으로 그렸든 이름 모를 석공의 불심으로 그렸든 지극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 높은 절벽 위에 어찌 감히 부처님을 모실 수 있었을까. 천 년 전 누군가가 품었을 불심에 사뭇 옷깃을 여민다.

지장전을 지나 바위 사이를 돌아 올라가면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산왕전이 나온다. 산왕전은 옛날 의상, 원효, 도선, 진각, 네 분의 성인이 수행하던 토굴 터로 사성암 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유서 깊은 수행공간이다. 도선스님이 수행했다는 도선굴, 허리를 굽히고 몸을 낮춰야 걸을 수 있다. 고려왕조 창건에 일조했고 비보풍수의 선풍을 일으켰던 도선. 명예든 권력이든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었던 그가 이 좁은 바위틈에서 한겨울의 삭풍과 한여름의 폭염을 견디며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천 년 전 도선이 서 있던 그 자리에서 다시 나를 돌아본다.

명당 터에는 얽힌 이야기도 많다. 산왕전에서 만난 한 보살께서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신다. 여자의 몸으로 도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공양주(供養主)할머니. 그가 사성암과 인연을 맺은 것은 열일곱 살 때.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절에 들어온 것이 인연이 되어, 열반하실 때까지 팔십 평생 암자를 지키면서 홀로 도를 터득하신 분이셨다. 할머니가 젊었을 적에는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꽃 같은 나이에 이곳에 들어와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노보살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는 곳, 사성암은 분명 예사롭지 않은 성자들의 땅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그야말로 만다라(曼陀羅)다. 넓디넓은 들판 너머로 섬진강이 태극모양으로 흐르고 있고, 지리산의 넓은 산맥들이 사성암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스님들의 낭낭한 염불소리가 중생들의 미혹을 깨우고, 바람결에 들려오는 은은한 목탁소리가 중생들의 마음을 다독인다. 사성암과 어우러진 발아래 풍경은 마음으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지족천(知足天)의 풍경이었다.

벼랑 끝 암자에서 다시 묻는다. 삶이란 무엇인가. 중생들에게는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가 모여서 이루어지는 게 삶이 아닌가. 암자는 말한다. 성공과 실패는 본래 없는 것이니 분별심을 내려놓으라고…. 그래야만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다고…. 희망은 절망 끝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옛날 성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벼랑 끝에서 나를 놓을 수 있는 용기, 속된 것을 버리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야말로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땅의 좋은 기운과 스님들의 법문소리로 마음이 넉넉해진 오후, 아쉬움 한 조각 남겨둔 채 다시 신발끈을 묶는다. 사성암은 섬진강 자락에서 만난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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