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정원
기억의 정원
  • 안승현 청주시문화재단 비엔날레팀장
  • 승인 2020.01.28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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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시문화재단 비엔날레팀장
안승현 청주시문화재단 비엔날레팀장

 

한 움큼 마른 솔에 불을 붙인다, 뒤꼍 굴뚝으로 연기가 오르고, 샘물을 길어 부엌 가마솥에 부어 물을 데운다, 활활 타오르던 장작이 부넘이를 넘어 방고래를 지나 어느덧 시간이 지나 불의 힘이 한숨 잦아들었다 싶으면, 고무래로 타던 커다란 장작만을 깊숙이 밀어 넣는다. 아궁이 앞에는 오랜 시간 기름이 밴 무쇠 철판이 놓이고,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갓 짜온 들기름이 둘러진다. 달궈진 철판 위, 기름 냄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고, 설을 맞아 하나 둘 집으로 찾아드는 가족들을 부뚜막으로 불러들인다.

한 젓가락 크게 찢어 양념장에 찍어 먹고, 숯불에 가래떡을 구워 조청에 찍어 먹는 행복한 맛의 하루는 여러 날 전부터 분주했던 시간이다. 마당에서는 장작을 패고, 집안 곳곳 작은 화단이지만 정성껏 정리를 하고, 맷돌을 맞춰 불린 콩을 갈아 시렁을 걸어 콩물을 내려 두부를 만든다. 텃밭에 묻어두었던 배추며 대파를 꺼내 다듬고, 우물을 길어 씻어 채에 거르고, 쌀을 불려 가래떡을 빼다 골방에 넣어 썰기 좋게 굳힌다. 육전과 만두소를 만들 돼지고기도 갈아오고, 엿질금을 만들고, 밥알을 삭혀 식혜를 만들어 시원하게 마실 양 밖으로 내었다. 그렇게 분주한 시간은 대문에서 마당으로, 헛간에서 부엌으로, 뒤꼍 장독대에서 부뚜막으로 이어졌다.

이젠, 털이 잔뜩 묻은 눈깔사탕을 입에 넣어주는 할머니, 장작을 패어 헛간에 쌓아 겨우내 땔감을 준비하던 아버지, 무쇠철판에서 부침개를 만들어 주던 엄마, 설 명절이면 집을 찾아 음식을 나눠 먹던 큰형, 작은형, 누나는 자리를 함께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삼형제 가족의 기억에서 이번 설도 같이했다. 차례상을 차려놓고 향이 다 타들어가는 동안, 음복을 하며 상을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가족의 기억을 담아 한집안에 모여 행복한 시간을 뒤로, 두 동생을 처가로 보내고, 아버지가 그랬듯 난 뜰로 나가 하던 소일거리를 만들어 움직인다. 엄마가 심어놓은 여러 수종의 나무를 정리하고 아버지가 쓰시던 연장과 농기구를 매만지며, 아버지가 소일거리를 찾아 움직였던 뜰에 발을 디뎌가며, 아버지의 기억을 정리한다. 가족의 흔적을 남겨서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의 곳곳이 오래된 흔적, 잊히지 않는 흔적을 고스란히 담았다. 나만의 비밀의 정원이며, 가족 모두 기억의 정원이 된 뜰. 검게 굳어버린 부엌천장의 나무그을음, 기름때가 배이고 켜켜이 쌓여 검게 변한 무쇠솥, 뒤꼍의 장독이 오래전 설날을 기억하게 한다. 오래전 설날은 이제 정원이 되었다.

정원은 새로운 만남을 맞이한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나는 삼 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 온종일 쫑알거리는 삼 남매는 이제 예전의 내가 되었다. 다섯 식구가 한가족이 되어, 설 연휴 이제는 함께 할 수 없는 가족의 이야기를 나누고 찾는다. 삼 남매와 가족의 기억을 이야기하며, 그 기억을 작은 뜰에 담는다. 그래서 뜰은 가족의 온기를 담는, 잊히지 않는 가족의 공간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이른 아침 제 집인 양 어슬렁거리는 아빠 고양이가 우물가에 이르러 물을 마시고 도도하게 자리를 뜬다. 가족을 이뤘지만, 맏이 까망이가 죽고, 막내 얼룩이 마저 가족의 곁에서 떨어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굳건히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고 여유롭게 겨울 따사로운 햇살을 즐긴다.

오후 들어 한두 방울 떨구던 빗방울이 디딤석 위에 무늬를 놓는다. 방고래 위에 놓았던 구들장을 모아두었다가 뜰의 중앙에 디딤석으로 놓았다. 형태와 두께가 제각각이지만 오랜 시간 방안에 온기를 전해 겨울을 나게 했던 아버지의 수고로움에 대한 기억이다. 겨울비답지 않게 제법 내리는 빗방울에 디딤석은 더욱 진하고 깊이 있는 거무스레한 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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