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시작된 청렴이야기
여행에서 시작된 청렴이야기
  • 오종윤 청주시 흥덕구 건설과 주무관
  • 승인 2020.01.2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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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오종윤 청주시 흥덕구 건설과 주무관
오종윤 청주시 흥덕구 건설과 주무관

 

청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일까? 대부분 사람들은 다산 정약용, 황희 정승, 퇴계 이황 등을 떠올릴 것이다. 우리나라 위인들에 대한 청렴 일화는 많기에 나는 해외 인물에 대한 청렴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치민의 이야기이다.

베트남 호치민시로 여행 갔을 때 관광 중에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한 인물의 초상화였다. 여기저기 보이는 한 남자의 사진에 궁금증이 생겨 베트남으로 이민 가 살고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친구의 설명으로는 그가 호치민이며 그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존경심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은 왜 호치민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을 보이는 것일까.

호치민은 1890년 베트남 중부지방 작은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호찌민은 1911년 신학문 공부를 위해 증기선의 견습 요리사 자격으로 프랑스로 떠난 뒤 영국 런던, 미국 뉴욕 등을 거쳐 다녔다.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 시야를 넓혀가며 사회주의 혁명가로서의 가치관을 성장시킨 그는 세계 1차 대전의 종료 이후 파리에 정착해 식민지 해방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프랑스로부터의 베트남 독립운동 전개에 크게 노력했고,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베트남은 일본 제국 정부가 포츠담 선언을 통해 항복 문서에 조인한 1945년 9월 2일 공식적으로 베트남공화국으로 독립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독립의 기쁨도 잠시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갈라지게 됐다. 호치민은 북베트남의 최고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여했지만 1969년 9월 2일 바라고 바랐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토록 평생을 조국을 위해 살아온 그의 나라 사랑과 헌신을 기억하기에 베트남 시민들은 그를 영웅처럼 생각하기도 하지만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그의 자세는 그를 더욱더 존경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호치민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소박한 성격을 보였다. 그의 거처는 조그만 오두막이었으며 작은 서재에 몇 가지 생활 도구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한다. 항상 허름한 농민복을 입고 다녔으며, 고무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끌고 다닐 만큼 검소하기도 했다. 항상 이런 모습으로 살았기에 이런 모습에 친근함을 느낀 베트남 국민들은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부를 만큼 친근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높은 위치에 올라서도 고향과 고향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향이 밝혀지게 될 경우 같은 연고라는 이유로 청탁이 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또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베트남 국민들에게 청렴을 전파했다.

“시신은 화장하고 검소하게 장례를 치러라. 정치 보복은 절대 하지 마라. 국가유공자는 지성으로 돌봐라.”

호치민의 유언이다. 하지만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기에 베트남은 그의 시체를 보존했고, 지금까지도 그는 베트남인들과 함께하고 있다.

높은 위치에 올라서도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나라를 사랑하며 청렴으로 일관하며 살아간 그의 삶을 써 내려가며 공직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청렴이란 어떤 것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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