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0.01.2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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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밤새 도둑눈이 내렸다. 눈을 처음 본 사람마냥 나는 한참을 그렇게 밖을 바라보고 있다. 올겨울은 눈을 보는 것이 쉽지가 않다. 얼마 전에는 겨울비가 꽤 많이 내렸다. 이상기후 현상의 탓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앞으로 겨울도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오늘 아침에도 많은 눈은 아니었다. 온 세상을 덮을 정도로 하얀 설원이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눈이라는 생각에 반가웠다.

`도 우트 데스(Do ut des)', 이 말은 라틴어에 나오는 말로 `네가 주니까 나도 준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로마법의 채권 계약에서 나온 법률적 개념으로 유럽의 세속주의와 상호주의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요즘 심심찮게 영국 왕실의 이야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 되고 있다. 그 주인공은 해리왕자 부부이다. 이들은 왕실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그들에게 주어진 직책을 내려놓는 것만 아니라 재정적 지원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해리 왕자는 독립을 선언한 이유를 아내 때문이라고 한다. 아내가 파파라치를 피하려다 자동차 사고로 숨진 자신의 어머니 다이애나비와 비슷한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다.

왕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데는 모르긴 몰라도 여러 가지 일이 얽히고설켜 내려진 결정이었을 것이다. 메간 마클은 배우 출신이다. 그녀에게 어쩌면 영국 왕실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더 이상 개인의 자유가 박탈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배우라는 직업도 개인의 자유가 충분하지 않은 건 맞지만 왕자비의 자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자리임에는 틀림없다. 어쨌거나 해리 왕자와 배우 메간 마클은 왕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응원 속에 결혼에 성공했다. 결혼소식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만큼 이번 독립 선언도 결혼 소식 못지않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어떤 이는 두 사람의 경제적인 면을 들면서 독립 선언이 뭐 그리 대수냐 하겠지만 사실 영국에서 왕실의 지위는 일반인들과 비교해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해리 왕자 부부는 일반 서민으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의든 타의든 그 두 사람은 많은 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파파라치들은 부지런히 두 사람의 일상을 사람들에게 알려 줄 것이다. 그러니 온전한 자유는 누리지 못할 건은 뻔한 일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행보에 많은 이들의 응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것도 커다란 용기이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에서는 올봄부터 해리 왕자의 모든 왕실 직책을 공식적으로 내려놓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영국 왕실의 이번 행보를 보면서 `도 우트 데스(Do ut des)'가 생각났다. 관용과 대화의 기본 원리로서 `상호주의'와 `상호성의 원리'가 적용된 이 말이야말로 이번 일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네가 주니까 나도 준다'라는 말은 언뜻 보면 참 야박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한편으로 내가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내가 주기보다는 누군가에게 받기만을 바라는 현대인들에게 `도 우트 데스(Do ut des)'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일까. 아무도 모르는 나의 가치를 이제부터라도 만들어야겠다. 그것은 흰 눈이 얼마나 겨울을 아름답게 만들었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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