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門中)의 구심점이 된 정자 영동 화수루(永同 花樹樓)
문중(門中)의 구심점이 된 정자 영동 화수루(永同 花樹樓)
  • 김형래 강동대교수
  • 승인 2020.01.1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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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형래 강동대교수
김형래 강동대교수

 

영동 상촌면(上村面)은 충청북도의 최남단에 속해 있는데, 본래 황간현 남상촌면(南上村面)과 내남매하면(內南梅下面)에 속했던 지역이다. 황간현 남쪽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남상촌면이라 하였고, 1909년에는 황간군 상촌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동군 상촌면 지역이 되었다.

상촌면은 백두대간의 깊은 품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황악산(黃岳山), 삼도봉(三道峰), 석기봉(石奇峰), 민주지산(珉周之山), 각호산(角虎山) 등 높은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이룬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의 산수(山水) 편에, “아름답기로는 도산(陶山)이나 하회(河回)와 비교할 만하고 또 동쪽으로 황악산과 덕유산이 가까워서 난리를 피할만하다.”, “남쪽으로는 황악산과 이웃하여 상하의 두 궁곡(弓谷)이 있어 병란을 피할 만하니 참으로 복된 땅이다.”라는 표현이 보인다. 즉, 삼도봉 주변 어딘가에 만인이 난을 피할 만한 곳이 있다는 뜻인데, 영동 상촌면 사람들은 그곳을 궁촌(宮村)마을이라고 믿고 있다.

실제로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에서 상촌면으로 오려면 괘방령, 우두령(牛頭嶺), 질마재, 도마령 등의 고갯길이 유일한 통로이며 이런 까닭에 고려 말 왜구(倭寇)의 침략이나 임진왜란, 한국전쟁 등 병란 시에는 안전한 피난지가 되어주었다.

영동 화수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아담한 건물이다. 뒤편의 2칸은 방이고, 앞의 2칸은 누마루 형태이다. 사면 기둥 밖으로 쪽마루를 설치하고 평난간을 둘렀는데, 풍혈이 있는 청판을 끼워 장식성을 보여주고 있다.

화수루가 위치한 곳은 계류 주변의 풍치 좋은 곳도 아니고, 그윽한 분위기 감도는 심산유곡도 아니며, 활연히 트인 산천경개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은 더욱 아니다. 화수루는 주변에 논밭이 널려 있는 하도대리 돈대마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중수기에 따르면 영동 화수루는 1546년(명종 1)에 고성 남씨 수일파 문중에서 후손들의 강학처인 옥계서당을 건립하면서 그 옆에 함께 세운 부속건물이었다.

“…옥계서당 동쪽에 작은 누를 세우니 화수루라…, 1613년에 1차 중수, 순조 4년(1804)에 중수하노라…”라 기록되어 있다.

화수루는 처음에는 서당 옆의 누각으로 건립되었는데, 1804년(순조 4)에 현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서당은 없어지고, 화수루만 옮겨와 주로 문중 회의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옛 성현이 일컫기를, 군자는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소요하고 휴식한다고 했다. 그래서 서당처럼 공부하면서 수신(修身)하는 곳에는 소요하고 휴식하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화수루도 유생들의 휴식을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로서, 고성남씨 집성촌인 현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는 문중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것이다.

`화수루(花樹樓)'가 위치하고 있는 하도대리(下道大里)는 고성남씨 집성촌이다. 원래 황간현 남상촌면 지역으로 도천(道川)이라 불리었다. 조선 숙종 때 도대(道大)로 고쳤다고 하며 1895년 상도대와 하도대로 양분되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배의 돛대 형국이라고 한다.

`화수루(花樹樓)'는 말 그대로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정자'라는 의미이다. 꽃과 나무처럼 문중 사람들이 대대손손 서로 어울리며 다 같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정자가 `영동 화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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