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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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귀룡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 승인 2020.01.1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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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귀룡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나는 가끔 산사(山寺)에 간다. 가끔이라고 하지만 가급적이면 자주 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누군가가 물어본다. 왜 가는데? 가면 좋으니까. 뭐가 좋은데? 복잡한 마음을 단순하게 비우는데 좋지. 세상살이가 복잡한가? 사람하고 얽혀서 살다 보면 복잡할 수밖에 없지. 사람마다 머리가 복잡한 경험이 많아서인지 이에 대해 추가질문은 없다.

납득을 했나보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잠깐, 방심한 사이 아픈 질문이 툭 치고 들어온다. 절에 가서 수양한다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누구보다도 더 세속적으로 살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프다. 이 질문에는 인격수양을 한다고 하지만 인격적으로 수양이 가장 안 된 방식으로 산다는 비난이 담겨 있다. 요즘 내가 스스로에게 물어 답을 구하고자 하는 게 이 질문이다. 절에 가면 나는 비우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하산하면 상황에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를 안 쓸 수 없고 그래서 세속적 삶에 매몰된다.

철학하는 동료와 담론을 하다 보면 `당신은 탈속(脫俗)하기는 어려워'라는 단정적인 말을 들을 경우가 있다. 앞의 질문과 결합시켜 생각해보면 어차피 세속으로부터 벗어나려 해도 안 되니 그냥 가장 세속적 인간임을 인정하고 세속에 푸욱 파묻혀 살라고 하는 것 같다. 내 인생을 놓고 보면 훨씬 단순한 해법이다. 비우려고 절에 가고 내려와서는 가장 채워져 있는 방식으로 사니 삶에 자가당착이 생긴다.

위와 같이 생각하면 차라리 출가를 하거나 절에 가지 않는 것이 일관적인 삶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나는 절에 가고, 절에서 내려오면 일을 한다. 일관적이지 않게 산다. 삶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작년은 복잡한 한 해였다.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사회에서는 점점 더 격렬한 싸움을 하게 된다. 격렬한 싸움을 할 상황이 되면 그로부터 벗어나 보려고 산에를 자주 갈 수밖에 없고, 희한하게도 하산하면 더 격렬하게 싸우게 된다. 그러니 작년 한 해는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새해가 되면 운이 좋아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운이 좋아져서 삶이 단순해졌으면 좋겠다. 안 싸웠으면 좋겠고, 산사에 좀 더 자주 갔으면 좋겠다. 마음을 닦고 내려와 비운 마음으로 세상사를 여여(如如)하게 보낼 수 있었으면 한다. 지금 겪는 마음고생도 정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철학적 입장에서 내 삶을 돌이켜보면 내가 바라는 바가 해결될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다. 왜? 세상에 내려와 싸우지 않으려면 거슬리는 바가 없어야 한다. 거슬리는 바가 없다는 건 진속(眞俗)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걸 깨닫기 전에는 세상에는 반드시 거슬리는 바가 있으며, 수양을 하면 할수록 그 거슬리는 바는 점점 더 커지게 되어 있다. 마음이 복잡하면 거슬리는 사안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느라 바빠서 그 사안이 묻힐 수도 있지만 마음을 비우면 오로지 그 생각만 하게 되어 그 사안이 결코 미리 속에서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 같이 우매한 놈은 마음에 거슬리는 바가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증폭된다.

나 같이 우매한 놈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딱 어울린다.

스승이 좌선공부를 열심히 하는 제자에게 묻는다. 좌선해서 무엇을 하려는고? 부처가 되고자 합니다. 스승이 제자 옆에 벽돌을 하나 갖고 와 갈기 시작하였다. 제자가 묻는다. 벽돌은 갈아서 무얼 하려고 하십니까? 스승이 답한다. 거울을 만들려고 하지.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그럼 좌선한다고 부처가 될 수 있나?

우매한 놈이 산에 가서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겠다고 하니 하산하면 마음에 원망이 사라지지 않는 건 당연지사. 이런 우매한 놈하고는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싸우는 놈은? 나보다 더 우매한 놈이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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