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겨울
따듯한 겨울
  • 전현주 수필가
  • 승인 2020.01.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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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전현주 수필가
전현주 수필가

 

겨울 중 가장 추운 시기인 소한에 조용히 겨울비가 내린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나 보다. 연일 포근한 날씨로 인해 아직 두꺼운 얼음이 얼지 않아 얼음축제를 준비하는 지역에서는 안전을 위해 행사를 미루는 등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요즘 `추위 실종'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추위가 실종된 것인지 아니면 잠시 몸을 숨기고 맹위를 떨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따뜻한 겨울이 솔직히 좋다.

어릴 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추웠다. 버스도 춥고 학교도 춥고 기차 대합실도 추웠다.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추운 거실을 피해 방에서 밥을 먹고는 했는데 저녁상을 치우고 이부자리를 펴면 동생과 나는 으레 창문 앞으로 다가가 유리창에 얼음 꽃이 피어나는 기적 같은 광경을 지켜보곤 했었다. 안팎 기온차로 방 창문유리에 성에가 필 정도였으니 요즘 아이들은 상상도 못 할 추위였으리라. 어느 화가도 그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마치 식물이 빠른 속도로 자라듯이 유리창을 도화지 삼아 퍼져 나가는 아름다운 문양들은 미지의 세상 같기도 하고 꽃밭이나 숲 같기도 했다. 단 하나도 같은 모양이 없었다. 온종일 오늘은 무슨 그림을 그릴까 하고 생각해 놓았던 것처럼 한순간에 망설임 없이 그려나가는 솜씨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겨울 방학을 하고 추운 날이 며칠 계속되면 오빠와 나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현관 밖에 내놓고 잤다. 어느 날 아침 대야의 물이 꽝꽝 얼어 있으면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스케이트장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스케이트장 개장일을 다른 아이들보다 더 빨리 정확히 알아냈고 겨울이 다 가도록 스케이트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가끔 일기예보가 틀려 생각지도 않은 폭설이 내리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눈이 오면 걱정부터 시작하는 어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온 종일 눈밭에서 뒹굴며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했다. 엄마는 우리가 금방 또 나가서 뛰어놀 것을 알면서도 중간 중간 우리를 불러들여 옷을 갈아입히고 양말을 갈아 신겼다. 참 이상하다. 그렇게 추웠던 날들의 기억들이 모두 따뜻하다.

지난가을을 힘겹게 보냈다. 늦은 여름에 막내가 다쳤다고 군부대에서 연락을 받은 순간부터 입원과 수술과 재활 등의 모든 과정들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모르겠다. 마치 우리 가족에게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했다. 그중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문득문득 불안해하는 아들을 안심시키는 일이었다. 인터넷의 넘쳐나는 온갖 정보들은 오히려 우리를 불신과 혼란에 빠뜨렸다. 아들은 사람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이이기에 틈나는 대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사하게도 아들은 얼마 전 완치판정을 받았다.

그때부터였던가. 우리 집에 김치가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 지인들은 내가 김장을 엄두도 못 내고 지나치리라는 것을 알고 내 몫의 김장을 조금씩 더 한 모양이었다. 사랑은 종종 생각지도 못한 이름으로 바뀌어 마음을 어루만진다. 김치를 먹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하다. 따뜻한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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