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할 용기
모험할 용기
  • 이창옥 수필가
  • 승인 2020.01.13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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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창옥 수필가
이창옥 수필가

 

심장이 두근두근 쿵쾅쿵쾅 이런 느낌 오랜만이다. 아니다. 얼마 전 반 고흐의 레플리카 체험 전에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림에 대해서는 그릴 줄도 그렇다고 안목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뛰었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난 후에도 웬일인지 두근거림은 진정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두근거림의 원인이 뭘까 생각하며 전시장을 다시 둘러보고 귀에 붕대를 한 고흐의 자화상 앞에 멈춰 섰다.

생전 지독하게 궁핍했고 그림에 대한 열정과 광기로 예술 혼을 불태우던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의 고독하고 초점 없는 시선을 감히 내 눈빛으로 따라나섰다. 어디로 향한 걸까. 별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꾸고, 그가 생활했던 요양병원을 지나 까마귀가 날고 있는 밀밭에 멈춰 섰다. 서른 일곱 해 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전해지는 곳이었다. 그 처절한 광기가 서늘해 그림을 외면하고 그림 위의 글귀에 시선을 옮겼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살아있다.”

“모험할 용기를 갖고 있지 않다면 무엇이 인생이란 말인가?” 서늘함에 잠시 진정됐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 심장은 위대한 화가의 그림이 아니라 그림 위의 문장들을 읽어내며 반응했던 거였다. 그동안 갈팡질팡하던 생각들이 정리되었다. 어이없게도 나는 고흐의 처절한 자화상 앞에서 서툴지만, 비로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알아챘다.

이 년 전 몇 해 동안 쓰던 칼럼을 접었다. 한 달에 8매 원고 한편이었다. 정체성도 방향성도 없이 한 달 두 달 그렇게 5년을 썼다. 치열함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 내 글에 좌절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 같아서 힘들었다. 혹시라도 어딘가에서 단 한 사람의 독자라도 있다면 그는 또 무슨 죄란 말인가. 나를 돌아보기 위해 멈춰야 했다. 명분은 그러했다.

처음에는 홀가분했었다.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도 몸도 가벼웠다. 그동안 왜 계속 짊어지고 있었는지 스스로 미련스럽게 느껴져 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강박 끝! 자유 시작! 속으로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자유로웠다. 처음 서너 달은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이 책 저 책 넘나들며 읽기도 하고 나름 치열하게 고민도 했다.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치유의 시간이라 생각하니 덤덤했다. 그러나 자유로움도 잠시였다. 나는 시간이 가장 위대한 해결사란 생각에 공감하는 편이다. 그런데 글 쓰는 일은 그 시간이 해결사 노릇을 거부하고 2년 내내 나를 흔들었다.

글을 계속 써야 할까. 아니 쓸 수 있을까. 아마도 내 흔들림에는 자질부족도 한몫했으리라. 시간이 흐를수록 공허했다. 마치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을 방치한 기분이었다. 엉뚱하게도 위대한 화가 빈 센트 반 고흐의 레플리카 체험 전에서 그림이 아닌 문장을 읽어내며 글을 계속 써야 할 변명거리를 만들었다. “모험할 용기”

위대한 화가에게도 모험할 용기가 필요했는지는 헤아릴 수 없지만 내 인생에 글 쓰는 일은 시작부터 모험할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아마도 천재성도 자질도 부족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모험할 용기가 아닐까. 내 지레짐작만으로 가슴이 요동을 쳤나 보다. 앞으로 남은 나의 날들은 글을 쓰는 모험을 하며 살아 내보리라. 전시장을 나서며 흔들리던 마음이 고요해지고 있었다.

정말 모험할 용기가 필요해서 내 딛는 첫 걸음. 누군가의 도움이 아닌 내 결정으로 시작해야 하는 일이다. 그 첫걸음이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일이었다. 어렵게 내민 손을 그녀는 따듯하게 잡아주었다. 다시 시작될 모험할 용기에 가슴이 쿵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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