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와 윤석열
코미와 윤석열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01.12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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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지난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에게 패배한 후 힐러리 클린턴은 이렇게 말했다. “코미 때문에 졌다. 그로 인해 세 차례의 TV토론 승리와 트럼프의 음담패설이 담긴 녹음파일 파장으로 얻은 동력이 날아가 버렸다”. 그가 언급한 제임스 코미는 당시 FBI(연방수사국) 국장이었다. 코미 국장은 선거를 불과 11일 남기고 당시 힐러리의 최대 약점이었던 `이메밀 스캔들'재수사를 선언함으로써 선거 판세를 흔들었다.

힐러리는 국무장관에 재임할 때 자택의 개인 이메일 서버를 이용해 공무를 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인들과 이메일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상당량의 국가기밀이 누설된 것으로 밝혀졌다. 힐러리가 장관에서 물러난 후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났고 FBI는 수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FBI는 힐러리에게 고의가 없었다며 수사를 종결하고, 불기소 의견을 달아 법무부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대선이 전개되며 트럼프는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힐러리의 취약한 안보의식을 공격하며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몰아붙였다. 그런데 선거가 막판에 접어들 무렵 코미 국장은 추가 혐의가 드러났다며 돌연 재수사 방침을 언명했다. 힐러리의 최대 약점이 다시금 선거판의 이슈로 떠올랐다. 힐러리와 민주당은 명백한 선거개입이라며 반발했지만 엎어진 물이었다. 힐러리가 자신에게 패배를 안긴 장본인으로 코미를 지목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힐러리의 패인 분석에 따르면 코미는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5월 그를 갑자기 경질했다. 10년 임기를 겨우 4년 채운 시점이었다. 대통령이 밝힌 해임 사유는 “FBI를 이끌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언론과 민주당의 생각은 달랐다. 코미 국장은 해임 두 달 전에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개입했고 당시 트럼프 후보 선거캠프도 연루됐다는 의혹을 수사하겠다”고 공표했다. 대다수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을 겨냥한 FBI 수사를 저지하기 위해 코미를 내친 것으로 봤다.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화요일 밤의 대학살'이라고 불렀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탄핵 위기에 몰린 닉슨 대통령이 자신을 압박하는 특별검사를 해임한 사건에 빗댄 표현이었다. 닉슨은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하던 콕스 특별검사가 백악관에 대통령과 참모들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까지 요구하며 숨통을 조여오자 법무부에 지시해 그를 해임했다. 이날이 1973년 10월 20일, 토요일이었다. 언론은 `토요일 밤의 학살(Saturday night massacre)'로 부르며 비판했고, 이후 유사한 사례가 생길 때마다 같은 방식으로 불렀다.

일부 언론과 야당이 지난주 검찰인사를 `수요일 밤의 학살'로 지칭하며 비판하고 있다. 윤석열 총장의 수족을 잘라낸 전격 인사가 콕스 검사와 코미 국장 해임의 한국판이라는 주장이다. 공감하는 국민이 적지않다. 특히 코미 국장과 윤 총장의 추락 경로는 비슷하다. 정권에 기여하고 대통령의 신임을 듬뿍 받은 점이 그렇고, 주어진 칼을 임명권자로 향했다가 급전직하한 과정도 유사하다. 윤 총장 사퇴까지 이뤄지면 `수요일 밤의 학살'은 미국의 전작들을 압도하는 완벽한 방식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포착되고 있다. 항명죄로 징계에 회부해 수모를 줘서 물러나게 할 것이라는 전망도 돌고 있다.

토요일과 화요일 밤의 학살은 대통령들에게 독이 됐다. 특검 해임은 닉슨의 명줄을 재촉했다. 여론이 급격히 악화했고 하원은 탄핵안을 가결했다. 상원까지 탄핵 일정에 들어가자 닉슨은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왔다. 코미 국장 해임도 트럼프 대통령 탄핵여론에 기름을 부었고 결국 하원의 탄핵 가결까지 이어졌다. `수요일 밤의 학살'은 미완으로 그쳤으면 좋겠다. 미국 정치사의 오점이 한국에서 재현됐다는 국제적 조롱 외에 얻을 게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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