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은 독서논술강사
  • 승인 2020.01.12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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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독서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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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서 관계에도 요령이 생긴다. 어릴 땐 나를 찾아주고 함께 하는 친구들이 많아 그저 좋았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생각이 달라진다. 나와 맞지 않거나 내 취향(?)의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게 꺼려지면서 자꾸만 사람을 가려서 만나게 된다. 부정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상처받지 않기 위한 나름의 방어기제가 발동한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고집이나 강한 신념이 상대방을 어렵게 만든 날이 더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면에서 정진호 작가의 그림책 『벽』은 성찰하기 좋은 화두다.

벽은 `안과 밖의 이야기'라는 명제로 시작하는 문장이 가슴에 확 박힌다. `그렇지, 벽은 안과 밖이 존재하지, 그걸 생각 못 하고 늘 한쪽만 보고 살았구나'하는 첫 깨달음에 놀란다. 벽은 놀라워서 내가 어디 서 있는지에 따라 안과 밖이 바뀐다.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어느새 밖을 내다보고 있는 상황, 안으로 들어갔는데 밖으로 나와 버린 상황, 볼록한 곳을 바라보았는데 오목한 벽이었고, 오른쪽으로 꺾었는데 왼쪽으로 가고 있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내가 얼마나 많은 벽을 세워 살고 있는지 깨닫는 동시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이 들어가며 관계의 소심함에 잡힌 내게 본질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공간의 세계를 통해 자신을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건축을 전공한 작가는 군더더기 없는 명확한 그림으로 생각의 확장을 열어준다. 글 밥도 많이 없어 오히려 생각을 자극하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사유하게 하는 매력적인 책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래'라는 말은 핑계라고 단언해본다. 나이가 들어서기보다는 `생각의 게으름'으로 더이상 사고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지침과 무심함으로 갑옷을 지어 입은 중년의 낡은 사람의 변명으로 해석된다. 언제부터 사고가 굳어졌을까 돌아보니 살아오면서 쌓인 경험과 지식이 한몫했던 것 같다. 실패와 상처를 줄이기 위한, 살아남기의 필살기가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하나의 고정관념을 만들고 그것을 잣대 삼아 재고 잘라내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문득, 장자와 혜자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임금이 커다란 박씨를 주어 심었더니 큰 박이 열렸는데 매우 커서 바가지로 못 쓰고, 무겁다며 버렸다는 혜자의 말에 장자는 “그대는 참으로 크게 쓰는 일에 서투르구려, 어째서 그것으로 술통을 만들어 강물에 띄워놓고 즐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 커서 쓸모가 없다고 걱정하는 거요?”라며 일침을 가한다. 자유로운 철학자 장자는 세상 어느 것에도 아름다움과 쓸모가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생각의 게으름은 사고의 정체(停滯)를 가져오고 관계와 소통에 있어 소외될 뿐이다. 신념도 굳어져 오래되면 고정관념이 된다는 니체의 말에 공감한다. 늘 새로운 생각을 한다는 것은 피로도가 쌓이는 것이겠지만 그만큼 다양한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마다 처한 상황과 현실은 다르지만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의 고민은 평등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바라보는 시선에 자본의 논리 없이 순전한 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작가는 그림책 첫 장에 명료하게 말한다. 「벽은 안과 밖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들은 안팎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면들을 함께 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입니다」 지금의 상황과 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무엇도 탓할 것 없이 이것은 순전한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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