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점
생장점
  • 한기연 수필가
  • 승인 2020.01.0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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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오래전 꽃 시장에서 사 온 잎 넓은 식물에서 새순이 돋았다. 줄기는 굽이굽이 휘었는데 용케도 뿌리를 굳게 내렸다. 줄기가 굽은 것은 햇빛을 찾아 헤맨 흔적으로 보인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남편이 가지치기를 안 해서 제멋대로라고 한마디 건넨다.

`가지치기'라는 단어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한국어와 방과 후로 공예를 가르치면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니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더구나 몇 년 전부터 방과 후 강사가 공개모집으로 면접을 치르게 되면서 연말만 되면 심적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크다. 20년 넘게 해 왔던 학교와는 다행히 재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새해 일정을 보니 인기 많은 부서가 내가 하는 요일에 한 반이 더 생겼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함께 했던 선생님께 의논했더니 다양성도 좋지만, 분야를 정해서 전문성을 키우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부화뇌동하며 수업하는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았다.

나무를 위로 곧게 키우려면 나뭇가지 끝의 생장점을 제거하고, 옆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줄기 끝의 생장점을 제거하면 된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식물은 광선을 좇아 굽은 줄기로 새순을 틔우고 뿌리를 내렸다. 그런데 나는 가지를 치지도 않았을 뿐더러 지향점이 무엇인지 목표도 없이 무분별하게 배우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한국어와 공예 강사라는 두 가지의 직업 중 공예를 더 오래 해 왔지만, 전문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22년 전 방과 후 수업을 시작했을 때를 반추해보면 대나무의 퀀텀 리프(Quantum Leap)가 떠오른다. 대나무는 씨를 뿌리고 2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고 싹도 트지 않는다. 3년째 되어서 겨우 30cm의 죽순이 모습을 드러내고, 4년째에도 그 크기 그대로이다. 그런데 5년째가 되는 해에 마디마다 생장점이 터지면서 하루에 1m씩 자란다. 이를 가리켜 퀀텀 리프(Quantum Lea p)라고 하는데 1시간에 소나무가 30년 걸려 자라는 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한다. 이러한 성장의 배경은 4년간의 인내와 노력에 있다. 4년 동안 대나무 뿌리는 지반을 움켜쥐듯 서로 얽히며 땅속 깊숙이 뻗어 내려간다. 나도 이와 같은 성장을 했다.

처음 방과 후 강사로 시작할 때는 배우는 중에 겁 없이 은사님의 도움으로 수업을 하게 됐다. 그 뒤로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배우고 노력한 결과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 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성장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에 소홀했다. 식물의 생장은 건강한 생장점의 유지에 달렸다고 한다. 100세 시대에 인생의 전반기를 지나 후반기로 들어섰다. 기계도 정비를 소홀히 하면 오래 쓸 수 없다. 이처럼 인생에 가지치기를 잘하는 것도 관리의 한 방법이다. 자신의 인생 마디마디에 있는 생장점을 잘 찾아내서 어느 부분을 살리고 어느 부분을 없애야 할지 결단이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그냥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 가고 싶다.

다시 시작이다. 여러 가지 잡기 중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지향점을 바로 세우려 한다. 계약직의 두려움을 뛰어넘는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해 제2의 인생설계를 `나의 생장점'찾기부터 해야겠다.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목표를 향해 해야 할 일을 적어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다림의 시간으로 폭발적 성장을 보여 주는 대나무처럼 훗날 노년의 내 모습을 그려보니 흐뭇하다.

어느새 남편은 가위를 가져와 식물의 굽은 줄기에서 가지치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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