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과 독수공방
겨울밤과 독수공방
  •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20.01.0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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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 중국어과 교수

 

겨울은 무채색의 계절이다. 형형색색의 꽃과 풀, 그리고 나뭇잎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리라. 눈이 내려 온 산야를 덮고 나면 세상은 순식간에 순백의 나라로 바뀐다. 깨끗하고 황홀한 정경이지만, 오래 보고 있으면 단조로운 느낌을 면하기 어렵다. 회사후소(繪事後素)라 했던가?

겨울의 으뜸 풍광은 눈이 하얗게 내린 바탕에 무언가 유채색이 가해져야 한다. 그것이 파랑일 수도, 노랑일 수도, 빨강일 수도 있다.

조선(朝鮮)의 시인 장유(張維)는 흰 바탕 위에 무슨 색을 그려 넣었을까?

눈 속의 동백꽃

雪壓松筠也欲摧(설압송균야욕최)눈 앉은 소나무 대나무는 부러지려 하고
繁紅數朶漸新開 (번홍수타점신개) 새빨간 꽃 몇 송이가 점점 더 벌어지네
山扉寂寂無人到 (산비적적무인도) 산속 사립문은 조용하여 오는 사람도없는데
時有幽禽暗啄來 (시유유금암탁래) 가끔 산새들이 몰래 쪼으러 오네

 

한겨울 시인의 거처는 산속이다. 언제부턴가 눈이 쌓여, 집 주변에 있는 소나무와 대나무는 가지가 휘어져 꺾이려 할 정도니, 눈이 온 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겨울이 돼도 잎이 지지 않는 상록수이다. 그래서 잎에 눈이 쌓일 수 있고, 또한 눈의 흰색과 대비를 이루어 흰 눈의 단조로움을 덜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보다 비할 수 없이 강렬한 대비가 있으니, 다름 아닌 붉은 꽃이 그것이다. 한겨울에 피는 붉은 꽃 하면 떠오르는 것이 동백이다. 집 주위에 상록의 소나무와 대나무가 있는 것만으로도 겨울 복이 있다 할 터인데, 여기에 붉은 동백까지 얹어지니, 가히 시인은 겨울 복을 타고난 사람이라 부를 만하다.

시인이 기거하는 산속 집에도 사립문이 달려 있긴 하지만, 그 사립문은 언제나 조용하기만 하다. 와서 두드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겨울 눈이 잔뜩 쌓인 산속이니 사람들이 올래도 올 수 없는 형편 아니던가? 사립문의 적막이 가끔 깨지는 일도 있는데, 이는 사람이 찾아와서가 아니다. 산 새들이 먹이를 찾아왔다가 혹시나 하여 쪼곤 하는데, 그 소리가 사립문에서 나는 거의 유일한 소리이다.

눈이 쌓여 만들어진 흰색의 단조로움을 깬 것이 동백의 붉은빛이라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생긴 적막함의 단조로움을 깬 것은 새가 사립문을 쪼는 소리이다. 동백꽃과 산새는 시인에게 둘도 없는 겨울 친구인 셈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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