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죄부터 하는 게 도리
사죄부터 하는 게 도리
  • 권혁두 기자
  • 승인 2020.01.0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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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권혁두 국장
권혁두 국장

 

지난 2018년 7월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해외유학을 떠나겠다고 밝혔다. 정치를 쉬겠다는 뜻이었다. 얼마 후 서울시내 한 건물에서 벌어진 기자와의 추격전이 그가 매체에 남긴 정치인으로서의 마지막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기자를 맞닥뜨린 그는 황급히 등을 돌려 계단을 통해 달려내려 갔다. 기자가 쫓아가며 한마디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도망치듯 계단을 질주했고 일행이 기자를 제지하는 사이 자취를 감췄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그가 그제 정치복귀를 선언했다. 그의 컴백 소식을 듣자마자 그가 기자를 피해 다급하게 달아나던, 재작년의 민망했던 장면이 불쑥 떠올랐다. 당시 그의 모습에서는 한국 정치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그 여세로 한때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기도 했던 거물 정치인의 풍모는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기자를 보고는 기겁을 해서 이해불가의 삼십육계로 내달리는 구차한 행색에서 훗날을 기약하는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의지를 읽기는 불가능했다. 안철수는 정치를 완전히 떠났구나. 이것이 당시 내린 개인적 결론이었다. 결국 오판이 됐지만.

그의 재등장에 대한 정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중도주의자인 그가 진영 간 격돌로 경색된 정치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론도 있고, 흘러간 옛 영화에 사로잡힌 기회주의자에게 재기는 없을 것이라는 악평도 들린다. 향후 행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전망이 나온다. 적극적인 구애를 보내는 바른미래당을 기반으로 제3지대 통합을 추구하거나, 독자적으로 빅 텐트를 치고 보수·중도를 아우른 세력 구축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어쨌든 작금의 정치현실은 그에게 희망적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유권자 20% 이상이 무당파를 자처하고, 정치를 바꾸려면 제3의 정치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견해에 공감하는 유권자도 절반에 달한다. 제1야당인 한국당은 패스트 트랙 저지에 승부를 걸고도 지지율이 하강하는 난감한 처지에 빠져 있다. 안 전 대표가 총선을 목전에 둔 야권에 결정적 변수가 될 여지가 없지 않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는 복귀를 알리는 페이스북에서 “우리나라의 정치는 8년 전 저를 불러주셨던 때보다 더 악화되고 있다”고 했다. 또 “이념에 찌든 기득권 정치세력이 사생결단해 싸우는 동안 미래 세대는 착취당하고 볼모로 잡혀 있다”고 주장했다. 맞는 진단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 자신과는 무관한 듯 말하는 안 전 대표의 화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가 지난 2016년 창당한 국민의당은 불과 두 달 만에 치른 총선에서 38석을 얻으며 제3당에 올랐다. 특히 정당득표율(26.74%)에서는 민주당(25.54%)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한국 정치사에 전례가 드문 혁명적 사건이었다. 참신한 이미지로 중도정치 설파에 성공한 그의 성취이기도 했지만, 낡은 정치에 새 바람을 일으킬 제3의 정치세력을 선택한 유권자의 혜안이 거둔 결과였다.

그러나 안 전 대표는 국민의 성원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2017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풍비박산이 난 한국당 홍준표 후보에게도 지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새누리당 탈당파와 합쳐 만든 바른미래당은 당권과 노선 싸움으로 날을 지새며 사분오열을 거듭했다. 그가 서울시장 선거의 참패(19.55%)에 책임을 지는 방식은 `도망치듯'떠난 해외유학이었다. 국민의당의 후신인 바른미래당은 지금 대표만 덩그러니 남은 껍데기 정당으로 전락했다. 안 전 대표가 개탄한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유권자 27%가 지지해준 정당이 무능으로 일관하다 사실상 공중분해 한 허망한 행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는 국민에게 사죄부터 해야 한다. 그다음에 `정치는 국가의 미래를 위한 봉사'라고 한 자신의 소신에 충실함으로써 속죄하길 바란다.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불을 지필 쏘시개가 돼달라. 과실이 아니라 결실에 기여할 씨앗이 돼달라. 안철수에 거는 국민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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