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절동 우적에서 찾은 청주의 역사
송절동 우적에서 찾은 청주의 역사
  •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 승인 2019.12.2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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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1992년 4월 봄기운이 피어오르던 어느 날 오후였다. 할머니 한 분이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찾아오셨다. 몹시 낙담한 표정이었다. 비닐봉지 속에는 몇 점의 토기 조각이 담겨 있었다. 봄이 되어 송절동 화계마을 뒷산의 남편분 묘소를 찾아갔는데, 산불이 나 주변 잡목은 불에 탔고, 남편 봉분 앞이 파헤쳐져 있어 놀랐다고 한다. 혹시 누군가 남편무덤에 추가 매장한 것이 아닌가 걱정하고 계셨다. 현장에 가서 확인하니 상석 뒤쪽 봉분이 파헤쳐진 상태였다. 도굴한 흔적이다. 주변에 토기 조각들이 눈에 띈다. 마한시대 토기이다. 이 토기조각 몇 점이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마한문화의 흔적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1992~93년 발굴로 3세기 마한사람들의 편안한 안식처인 무덤[土壙墓] 12기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청주 송절동유적으로 학계에 보고하였다. 이를 계기로 송절동 일대가 마한~백제시대 고대 청주지역의 중심지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2014년 3월~2016년 2월에 이 유적과 이웃한 송절동, 화계동, 외북동 일원에서 대규모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를 총괄하여 송절동 유적으로 이름하였다. 청주테크노폴리스 건설지역이다. 청주의 6개 조사기관이 참여하여 2년 동안 조사하였고, 각 조사기관이 상호 고고학 정보와 자료를 교환하며 학술적 협력체계를 마련하여 13권의 방대한 보고서를 펴내었다. 또한 학술대회와 기획전시회를 개최하여 송절동 유적의 다양한 고고학 정보를 공개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 유례가 없어 대규모 고고학 조사와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가 크다.

송절동유적은 유적 규모가 큰 만큼 땅속에서 찾은 고고학 자료도 풍부하다. 골짜기 퇴적층에서 중기~후기 구석기문화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신석기시대의 움[竪穴],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무덤, 초기철기시대의 집자리, 마한~백제시대의 집자리·무덤·제철로·움, 통일~고려시대의 무덤, 조선시대의 집자리·건물지·기와가마·무덤·우물 등과 메밀을 경작하였던 밭 등이 발굴되었다.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문화를 통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유구(遺構) 2,000여기와 유물(遺物) 8,300여점이 찾아졌다. 땅속에서 찾은 청주 역사의 흔적들이다.

이 중 송절동유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마한~백제시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흔적인 집자리와 무덤이다. 무덤은 모두 주변 조망이 유리한 낮은 구릉지의 정상부와 사면부 여러 곳에 군집을 이루며 조성되어 있다. 이에 비해 집자리는 무심천변 저지대 충적지에 분포한다. 산 사람의 안식처와 죽은 사람의 안식처가 공간상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 특히 집자리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논바닥 아래에서 찾아졌다. 고대국가 형성기 청주지역의 중요한 역사흔적들이 영원히 묻힐 위기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모래질 땅에 조성된 집자리는 무심천 강바닥보다 낮은 곳에 있어 적은 비에도 물이 샘솟아 유구 형태 보존이 어려웠고, 큰 비가 내릴 때면 유적 전체가 물에 잠기곤 하였다. 이곳에서 514기의 집자리를 찾았다. 마한~백제시대에 조성된 대규모 취락이다. 규격화된 주거구조로 보아 주거건축 담당 장인의 존재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유구양식과 토기, 마구, 철기 등 유물로 볼 때 무덤은 2세기~4세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조성되었고, 집자리는 3세기~4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송절동유적은 마한에서 백제로의 점진적 발전과정과 지역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시기를 전후한 무렵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죽음, 생활모습과 사회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유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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