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고요
깊은 고요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19.12.26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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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새벽, 마당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걸음이 멈추어졌다. 나뭇가지에 마치 눈꽃이 핀 것처럼 서리꽃이 아름답다. 어젯밤, 안개가 자욱하더니 나뭇가지마다 꽃을 피웠다. 고요를 이고 있는 소나무, 장독대 풍경이 너무나 조용하다. 이 고요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을까. 어느 시인이 고요를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 생겨난 어린 고요와 태고 적부터 있었던 늙은 고요라고. 오늘 새벽에 생겨난 어린 고요가 오래전에 생겨난 고요와 함께 풍경을 만들었나 보다. 그 고요를 깨고 싶지 않아 나도 가만히 서 있다. 풍경에도 깊이가 있다는 것을 이 산골에 살면서 보았다.

며칠 호되게 앓았다. 연말이라 송년모임도 많았고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끼리 식사자리도 있어 분주하게 보냈다. 체력이 내 분주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나 보다. 먹으면 토하고 쏟고 병원에 다녀와도 별 효과가 없고 물만 먹어도 소화를 못 했다. 꼼짝없이 집에 있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말처럼 바깥출입을 못했다. 한해를 돌아보니 참 분주하게 살았다. 새로 집을 지었고 그 와중에도 바다 건너 여행도 몇 번 다녀왔다. 그러니 몸이 주저앉혀놓은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분주하고 떠들썩한 세상에 살고 있다. 바람 없는 날이 없고 날마다 바람이 불고 때로는 비가 내리고 비와 바람이 함께 오는 날도 있다. 어떤 날은 거친 천둥과 번개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고요가 특별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하루에 몇 가지 일을 하고 약속이 많은 것을 자랑삼는다. 사람들은 시간 있다고 하면 찌질 하게 보일까 봐 한가해도 바쁘다고 한단다. 오늘날은 바빠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에 하는 말일게다. 분주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가끔 이런 고요가 절실하게 그리운 거다.

연초부터 이 산골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초봄에 시작해서 가을이 되어도 갈무리도 못하고 몸만 들어와 살고 있다. 꽃이 피기에 봄인가 하고 방심하고 벗고다니니 찬바람이 옷을 입힌다. 세상이 춤을 춘다고 나도 덩달아 춤을 추었다. 젊은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고 나이들은 사람들은 여유를 가지고 지켜봐 줘야 하는 것이다. 힘들어하면 슬쩍 거들어주는 여유, 속상해하면 어깨를 다독여주는 따스함을 지녀야 하는 것을 안다. 흙탕물이 일었을 때 같이 호들갑을 떨지 말고 바라봐주고 기다려주면 가라앉는다는 진리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도 철없이 놀고 있는 사이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이만큼, 두 번째 서른이 지나 간지 여러 해다. 오래된 고요가 이제 너도 고요해져라 하고 이 숲으로 보냈나 보다. 나이가 드는 것은 깊어져야 하는 것이다.

어둠이 비켜서면서 햇살이 나온다. 새벽 첫 햇살은 마당에 내려앉은 하얀 서리꽃에 불을 밝혀준다. 잔디밭에 새벽별이 뜬다. 비로소 풍경이 보인다. 봄과 여름, 가을에는 풍경을 바라볼 새도 없이 하루를 시작했다. 뜨겁기 전에 풀 한 포기라도 더 잡으려고 기를 쓰고 마당을 돌아다녔다. 지금 나뭇가지에는 서리꽃이 피었다. 이 겨울 어둠이 채 가시 전, 산골의 새벽은 깊은 고요다. 우주가 눈을 감고 참선에 든 것처럼 고요하다. 새해라고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한 해를 보내면서 그래도 한 가지 다짐은 해본다. 새해는 더불어 많이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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