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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5.0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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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노동절의 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절 행사는 1923년 일제 식민지 시절, 당시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인 '조선 노동 총연맹'의 주도하에 처음으로 시작됐다. 약 2000여명의 노동자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며 전 세계 노동자의 명절인 '메이데이' 기념행사를 최초로 치렀으며, 그 이후 1945년 광복되기 전까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굽힘 없는 투쟁을 전개해 왔다.

1945년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이하 전평)는 1946년 20만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메이데이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했다. 전평의 깃발아래 노동자들의 힘찬 함성이 울려 퍼진 서울운동장 야구장 바로 옆 육상경기장에서는 대한노총이 주최한 약 1000여명의 우익청년과 노동자가 참석한 초라한 기념식이 치러졌다.

미군정과 대한노총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폭력적인 전평 파괴공작으로 수많은 조합원이 해고되고 검거 되었다. 게다가 미군정은 정치색을 띤 노조는 일체 정당한 단체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마침내 전평을 불법단체로 만들었다. 이어 전평 타도의 기수로 미군정의 비호를 받아 무럭무럭 자라온 대한노총은 1948년부터 1958년까지 노동절 행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 이후 대한노총 주도하에 진행되었던 노동절 대회는 한마디로 출세와 돈에 눈이 먼 대한노총 상층부가 노동자 대중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승만과 자본가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날로 전락되었다.

1957년 이승만은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반공하는 우리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을 제정하라"는 명령을 대한노총에 지시했다. 이승만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한노총 결성일인 3월10일을 '근로자의 날(노동절)'로 결정했다.

무릇 모든 기념일에는 그 날짜에 치러져야 하는 특별한 이유와 의미가 있다. 그것은 1886년 미국 시카코 노동자의 투쟁과 희생인 '피의 헤이마켓 사건', 즉 노동자의 이익과 권리는 권력과 자본에 맞선 단결 투쟁을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세계 노동자들에 대한 생생한 역사의 일깨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날이 아닌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의 머릿속에서 '메이데이'라는 말조차 아예 지워버림으로써 이 땅의 노동자를 권력과 자본에 순종하는 일 잘하고 말 잘 듣는 기계로, 의식 없는 노동자로 만들려고 5월 1일 노동절을 대한노총의 생일인 3월10로 바꾼 것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은 단위노조에서 지역, 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어 '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를 결성하였다. 1989년 투쟁본부는 제100회 메이데이를 앞두고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굴욕에 찬 지난날의 근로자 인생을 청산하고 한국 전쟁이후 단절되었던 '5·1절 노동절'의 전통을 회복할 것을 선언하였다.

1994년 정부는 3월 10일에서 5월 1일로 근로자의 날로 개정하였다. 정부의 이런 법개정 이전에도 전국의 노동자들은 이미 1989년부터 이승만에 의해 빼앗겼던 5월 1일을 우리 힘으로 되찾아 3월 10일이 아니라 5월 1일에 세계노동절 기념행사를 치러왔다.

하지만, 정부와 자본은 5월 1일을 합법화하여 노동자들의 투쟁을 무마하고, 근로자의 날이라는 이름을 고수해 메이데이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동자 의식을 마비시키고 정부·자본에 대한 투쟁 열기를 식히려고 하지만 그것은 한낱 헛수고일 뿐이었다. 이미 우리 노동자들의 가슴속에는 수년간의 5·1절 투쟁을 통해서 지울 수 없는 노동절 정신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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