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2019년의 단상
인간, 2019년의 단상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19.12.17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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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전북 군산시에는 시인 고은의 흔적이 뚜렷하다. 미제방죽이라는 묘한 이름의 저수지 둑에 세워져 있는 고은시인 기념비에는 “고은의 삶과 문학을 기리고 군산문화의 꽃을 피우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다. 1933년 군산시 미룡동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시인과의 인연은 군산시 아파트 외벽을 비롯해 주민쉼터 등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안내를 맡은 관광해설사에게 짓궂게 물었더니 “작품은 작품이고 사람의 행적은…”하며 말끝을 흐린다.

시인 고은은 몇 년 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면서 한국문단의 신화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지구촌을 강타한 `미투'에 얽혀 그간의 `몹쓸 짓'이 드러나면서 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2명 선정했다. 그중 한 명인 페터 한트케는 <관객모독>이라는 작품으로 익숙하다. 배우가 관객에게 욕설을 마다하지 않는 파격과 실험으로, 한때 국내 극단에서도 앞다퉈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아름다운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도 그가 집필한 시나리오인데, `일상의 언어와 일상의 현실, 그리고 그것들에 수반되는 합리적 질서는 인간존재에 강제적이고 치명적인 영향을 주며 그 밑에는 비합리성과 혼란, 심지어는 광기가 숨겨져 있다.'(다음백과서전)는 평가가 있다.

페터 한트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인종주의와 증오와 폭력의 옹호, 독재자 유고슬라비아 연방 초대 대통령 말로세비치의 학살 부정과 추도사 낭독 등의 전력을 근거로 반대의 목소리가 거세다. 한림원은 “노벨문학상은 정치적인 상이 아니며 문학적 우수성을 정치적 관점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입장문을 이례적으로 발표하기도 했으나, 서점 진열대에는 공동수상자인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축의 작품만이 눈에 뜨일 정도로 불매운동은 여전하다.

문학을 전공한 이들은 전공필수과목으로 `작가론'과 `작품론'을 반드시 배운다. `작가론'은 작가의 작품과 예술사상, 활동 따위를 연구하고 비평하는 분야, 또는 그런 글을 말한다. 반면에 `작품론'은 개별적인 예술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평론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작가론'이 `작품론'에 비해 훨씬 거시적이고 통시적 평가 안목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작가적 양심을 떠나 인간으로서의 금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인물이 그럴듯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때, 그 작품을 보며 감동하고 열광하며, 그를 금과옥조로 삼았던 보통의 사람들은 혼란스러울 뿐이다. 몹쓸 짓을 주저하지 않으면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양심의 문제인데, 올 한해 역시, 보통 사람들은 그런 끔찍한 인간들의 숲에서 진실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독일의 신경생물학자인 게랄트 휘터는 <존엄하게 산다는 것>을 통해 “(인간은) 처음부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줄 장치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이상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그 인간다움을 찾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잘못을 저지르고 헤매는지는 인류 역사를 수놓은 그 수많은 끔찍한 행위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해마다 `올해의 사자성어'를 발표하는 교수신문이 `공명지조(共命之鳥)'를 2019년의 화두로 정했다. 머리가 두 개인 상상속의 새 공명조는 한 쪽 머리가 죽으면 다른 쪽 머리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공동체'를 의미한다. `서로 이기려 하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어느 한 쪽이 사라지면 죽게 되는 것을 모르는 한국사회의 안타까움'을 `공명지조'의 선정 사유로 담았다.

오늘이 2019년<수요단상>의 마지막 글이 될 것이다. 성탄절과 새해 첫날이 모두 수요일인지라 별일 없다면 2020년 둘째 주까지 글쓰기에 대한 고민은 덜게 됐다.

「멀리 가는 시외버스 뒷좌석에 낯선 사람끼리 나란히 앉아 서로 머리 기대고 잠이 들었다./얼마나 먼 꿈에 빠졌을까/그들 사이 오가는 호흡과 맥박이 일치되어 어깨가 함께 오르내렸다/<중략>/편안한 얼굴로 버스 속도만큼 질주해가는 낯선 두 사람의 잠 깊은 동행/먼 행로에 함께 가는 봄이 진달래 짙은 색으로 졸았다.」 <강영환/ 함께 가는 봄> `함께 가는 봄'처럼 새것을 맞이하는 새해. 모두가 사람으로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올해도 새해에도 우리 꿋꿋하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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