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땅 괴산의 향교서 찾는 공교육의 의미
미래의 땅 괴산의 향교서 찾는 공교육의 의미
  •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 승인 2019.12.1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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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땅이름 속에 다양한 정보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 이름을 보면 교촌이나 교동, 혹은 향교말, 향교골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그런 지명의 유래는 과거에 향교가 있었던 마을이다.

괴산읍에서 음성 방향으로 가면 나지막한 동산이 가로막고 있다. 동산 밑으로는 냇가가 흐르는데 이 하천을 동진천이라 부른다. 냇가를 따라 서쪽의 괴산군청 방향으로 가다 보면 향교말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왼쪽에는 괴산군청이, 오른쪽 언덕에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02호인 괴산 향교(槐山鄕校)가 있다.

괴산향교가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53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그 후에 여러 번의 수리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입구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고, 담장을 둘러 건물을 감싸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비교적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명륜당과 동재·서재 등이 있다.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는 내삼문을 두어 공간을 구분하고 있다. 해마다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올린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의 작은 면에 불과한 청안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현재의 증평군을 포함하는 청안현(淸安縣)으로 하나의 고을이었다. 일제강점기 충북선이 증평을 중심으로 놓이면서 청안은 교통의 중심지에서 멀어지고 자연히 발전이 더디게 되어 현재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괴산의 또 한 곳 청안향교(淸安鄕校)를 소개한다. 청안향교가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숙종 29년(1703) 사마소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향교는 그 이전에 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청안향교의 건물들은 1981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가 있다. 건물 주위로는 담장을 둘렀고, 명륜당과 대성전은 내삼문을 두어 구분하였다. 명륜당의 현판은 1733년(영조 9년)에 쓴 것이라 한다. 청안 향교 왼쪽에는 청안 사마소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3번 국도가 지나가는 이화령 아래에 있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03호인 연풍향교(延豊鄕校)가 있다. 중종 10년(1515) 지어진 이후 여러 차례 고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명륜당과 동무·서무가 불에 타 없어졌다. 1978년 대성전을 고쳤고, 그다음 해 명륜당을 다시 지었다. 입구에는 다른 향교처럼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으며, 담장을 둘러 건물들을 감싸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로는 대성전과 명륜당 고직사 등이 있다.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는 내삼문을 두어 배움의 공간과 제사공간을 구분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책은 이 지역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공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보편성과 평등성이다. 교육의 사회적 유용성과 기회균등을 위해 국가 책임하에 무상교육과 의무교육을 시행하며, 교육기본법 및 초·중등 교육법에 따라 설립된 학교에서 교육을 한다. 내용 면에서도 국가 사회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보편가치와 전통을 가르치고, 미래 사회의 필요한 내용을 습득하도록 교육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사교육이 개인의 성취와 이기적인 욕망 충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괴산의 향교들에서는 매년 여름·겨울 방학을 이용해 지역 학생들에게 한자와 전통 예절을 가르치는 충효교실을 열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은 시대는 달라졌다 하더라도 향교 본래의 임무인 공교육의 기능을 살린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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