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마름
용마름
  • 김기자 수필가
  • 승인 2019.12.1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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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기자 수필가
김기자 수필가

 

김장을 하느라 모였다. 막내인 나는 이렇게 항상 여러 언니의 도움을 받는 처지이다. 남의 손을 빌려도 되지만 핑계 삼아 자매끼리의 화목이 우선이기에 해마다 큰 행사로 자리를 잡는다. 적당한 가을 햇살마저 수다의 꽃을 보기 좋게 피우도록 해주고 있다. 그때 문득 환상 속에서 모락모락 오르던 초가의 연기가 가슴 깊이 깔려 드는걸 느꼈다. 깊고도 끈끈한 사랑의 회상이었다. 영락없이 나를 지켜주었던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지금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그림 같던 초가에 살았었다. 한참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던 때였으니 누구든 내 나이쯤이면 그 시절을 기억할 수 있으리라. 그러기에 지금 들녘에서 공 모양으로 뭉쳐진 볏짚이 가축의 사료로 옮겨지는 풍경을 보며 고향마당의 짚더미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제는 멀어진 이야기이고 흩어져버린 희미한 추억일지라도 잠시 마음의 발길을 옮기는 것은 왜일까.

집이란 형태와 무형태의 조직으로 견고해야만 온전하게 유지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어릴 때부터 확실한 바람이 되어 내 안에 자리를 잡았었나 보다. 한참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이런 생각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인내하고 다듬으며 걸어온 시간도 그곳에서부터 솟아난 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으리라. 지금껏 지내온 날들을 돌아보니 생명의 소중함과 삶의 가치도 집이란 곳에서 배움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가을은 지나온 것을 다독이며 지켜내기 위한 계절인 것 같다. 새롭게 떠오르는 포근한 기억들도 한몫을 한다. 또 다른 삶의 언저리, 마당에서 수확을 마친 볏짚을 곱게 다듬는 아버지가 저만큼 계시는 듯하다. 어렴풋한 풍경은 지붕을 새것으로 바꾸시려고 이엉을 엮는 모습이다. 얼마나 많은 손길을 모으셨을까. 낮과 밤을 여러 날 동안 구르며 새끼줄을 만들어내시던 수고가 어른거린다. 드디어 지붕을 새것으로 바꾸는 날, 지금 돌아보니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 행사였다. 그중에 가장 남는 기억은 용마름의 형상이다.

무슨 생각을 하며 계셨을까. 가족의 모든 안위를 지켜내기 위해 꼼꼼하게 엮으시는 손놀림이 어제 일 인양 가깝다. 마당 한가운데에 펼쳐져 있던 용마름이 바로 아버지의 권위와 몫이 서린 형상이라 생각을 하니 그때가 더욱 선명해진다. 철없는 딸이었을지언정 뛰노는 중에도 용마름만큼은 함부로 넘나들지 않아야 했기에 기억이 새롭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그 어떤 성체와도 같은 것이었기에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지금은 용마름을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잊고 싶지 않은 내 안의 유산쯤으로 여기려 한다. 아버지의 환영이 늘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듯해서다. 이제는 땅에 계시지 않지만 내게는 정신적 지주가 되기에 충분한 분이셨다. 용마름의 역할처럼 가족을 지키는 귀중한 몫의 담당자이셨다. 지붕의 중요한 부분 용마름, 그 아래로 촘촘히 둘러진 이엉 사이에 새끼줄과 같은 혈육의 인연, 그 인연에 오늘도 감사할 뿐이다.

아직도 마당 가득 김장 판이 펼쳐져 있다. 서로 끝내지 못한 화두는 친정아버지시다. 첫 아내인 내 엄마와의 사별 후에 다시 이루었던 가정, 그리고 살아오면서 일어났던 잔잔한 갈등들, 하지만 오늘까지 우리가 있도록 붙잡아 주셨던 사랑을 잊을 수 없다며 얘기꽃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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