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조와 진급
반조와 진급
  •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 승인 2019.12.12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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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자의 목소리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박경전 원불교 청주상당교당 교무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부업으로 돼지를 길렀던 적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업이었지만 가끔 부모님이 동시에 출타를 하는 날이면 나와 형이 돼지 밥을 주기도 하고, 분변을 치우기도 했다.

돼지는 영리한 동물이었다. 밥을 주러 오는 사람을 알아보았고, 팔려가는 다른 돼지를 보며 울 줄도 알았다. 나는 그런 돼지들을 보며 나 자신을 생각한 적이 있다.

나와 돼지는 무엇이 다른가? 내가 살이 쪘다는 썰렁한 농담이 결코 아니다. 그 당시에는 막연하고 어설픈 의문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과 동물의 존재론적 질문을 처음 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누군가를 간절히 좋아했던 마음도 언제 사라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이니 그저 막연히 떠올랐던 질문은 더더욱 쉽게 잊었을 게 뻔하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지곤 한다. 애견인과 애묘인이 점점 늘어나는 요즈음이니 개와 고양이를 놓고 생각하는 것이 더 쉽다.

나는 개와 무엇이 다른가. 인간과 개는 무엇이 다른가.

진화론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인간의 역사보다 훨씬 먼저 시작한 종들은 수없이 많다. 왜 그 종들은 인간과 같은 찬란하면서도 잔인한 발전의 역사를 갖지 못했을까?

단순히 지능의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인간 역시 처음부터 높은 지능을 갖지는 못했었지만 점점 더 높은 지능의 생명으로 태어난 것이다. 원시인의 지능이 지금 인류의 지능보다는 현저히 낮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생각일까? 생각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동물들도 생각을 하고,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 애견인과 애묘인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원불교의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는 수행인이 공부를 할 때 가져야 할 네 가지 마음으로 믿음(信), 분발(忿), 의심(疑), 정성(誠)이라 하였다. 나는 의심(疑)이란 조목에 의심을 가졌다. 공부를 할 때 왜 의심을 가져야 하는가?

종교가에서 의심이 없다면 맹목이 되고 만다. 공부를 할 때 의심이 없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의 확장이나 발전은 결코 오지 않는다. 의심을 할 때 공부는 더욱 단단해지고 더욱 성장할 수 있다.

나는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을 `의심'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심은 호기심의 의심이 아니라 반조의 의심을 말한다.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 것인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옳은 일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무엇을 하는 것이 나에게 옳은 일인가?'

내 몸과 마음이 편하고, 내 몸과 마음에 좋은 것에 만족하고 안주한다면, 어쩌면 내 팔자보다 더 좋아 보이는 애완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 의심하지 않고, 반조하지 않는다면 진급(발전)할 수 없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다.

연초에 세워 놓았던 계획들을 반조해 보아야 하는 시간이다. 하나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반조해 보아야 한다. 반조해야만 새해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진급하는 한 해가 되길 간절하게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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