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아내의 김장 솜씨, 맛난 김치를 1년간 넉넉히 즐기려고, 배추 모종을 심었다. 정확히 25cm 간격으로, 자그마한 호미로 뿌리가 내릴 공간을 확보했다. 포기가 커져 서로 닿을 듯 말 듯, 좁으면 서로 부대껴 자라는데 방해가 될까 걱정을 하면서. 땅을 갈아 없지 않고 완숙된 퇴비로 약간의 밑거름만을 했다.
배추는 몇 번의 비를 맞으며, 땅 내를 맡고 제법 배추다운 모양을 갖추었다. 칼로 갈랐을 때 꽉 찬 노란 고갱이를 생각하니 너무나 행복해 미소가 귀에 걸리는 듯했다. 그러나 기대감은 얼마 가지 않아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처음엔 배추 겉 부분에 몇 개의 구멍이 나더니, 모기장이 되고, 얼마 가지 않아 몇 겹의 배춧잎은 양파망이 되었다.
혹시나 싶어 눈을 비비고 봐도 역시나 초록색 양파망이었다. 양파망 하나에 배추 하나씩 넣어 고랑에 서 있었다. 그것도 잠시 양파망을 만든 벌레란 놈들은 안으로 세력을 키웠다. 이런 몹쓸 벌레들. 밤으로 새벽으로 헤드 랜턴을 머리에 쓰고 핀셋으로 한 마리 두 마리 배추포기에서 포식하는 놈들을 잡아냈다. 분명 배춧잎을 갉아먹는 이 벌레는 징그러우면서도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차라리 괴물이라면 잡아서 돈이라도 벌 텐데 아무 쓸모도 없는 이 버러지만도 못한 벌레 같으니라고.
그런데 배춧잎을 갉아먹는 벌레 입장에서 난 뭐지? 천적, 혹은 거대한 괴물? 내 입장에서나 벌레지, 벌레는 자연이라는 한울타리 안에 나란 놈하고 뭐 차이가 있을까? 어쩌면 이 벌레가 나보다 먼저 지구라는 땅덩어리 안에 정착해 더 오래 살고 있었던 원주민(?)이었을 텐데. 나만 잘 먹고 살겠다고 뭔 짓을 하는지, 알량하게 조금 더 먹겠다고 `벌레'를 잡아내어 신발 뒤꿈치로 뭉개버리는 난 커다란 괴물. 하늘거리는 바람에 팔랑거리는 날갯짓을 하는, 꽃들에 희망인 나비였을 때는 어여쁘다 해놓고는 참 줏대 없는 짓이다.
벌레(?)의 부수를 가진 한자는 모두 악이나 혐오의 상징, 괴물로 등장한다. 뱀(蛇), 거미(蜘蛛), 벼룩, 개미(蟻) 등. 영화나 작품에서 등장하는 괴물이나 심지어 외계인까지 `벌레'를 형상화한다.
20여 년 전 한편의 애니메이션에 빠져, 한 사람의 작품으로 한 벽면을 빼곡히 채웠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어린 소녀가 무동력 비행체를 타고, 커다란 곤충의 형체를 한 괴물에 쫓기는 한 남자를 구하는 장면과 음악에 압도되면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보기를 반복하던 때가 있었다. 내용은, `인간을 위협하는 괴물 `벌레'는 인류가 초래한 재앙이다.
인간에 의한 오염, 자연은 적응하면서 진화한다. 그러면서 오염원을 정화한다. 정화하는 과정에서 독소를 배출하게 되는데, 인간은 그런 자연을 `악'으로 규정한다. 독소는 해독제였다. `악'으로 규정된 자연은 제거의 대상이고 정복해야 하는 괴물이었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해야 하는 우월적 존재이다. 그러한 인식의 상황에서 `나우시카'는 자연을 알게 되고, 자연 앞에 희생하고, 자연에 용서를 구한다. 그 결과 자연은 인간을 용서하고 다시 평화가 시작된다. 내 입장에서 제압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악이다. 악은 없어져야 하는 대상, 괴물이다. 그런데 누구의 입장에서 악인지?
내가 목적한 바를 실현함에 걸림돌이 되는 과정은 모두가 악이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래서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필요한 것만 취하게 된다. 자본주의에 입각한 개발에 걸림돌인 자연은 밀어내야 할 `악'이다. 내 생각과 맞지 않는 사람,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악이다. 벌레로 치부된다.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잡초와 벌레는 악이다. 해충과 익충을 구분하지만 해충을 잡으려 살포한 약에 익충이 죽는다. 익충인 `벌'이 없는 인류는 멸망이다. 자기 입장에서 단편적으로 만들어낸 `악'이 `독'인지 `해독제'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