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원 - 벌레
사람, 원 - 벌레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19.12.1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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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알 고주알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올해도 아내의 김장 솜씨, 맛난 김치를 1년간 넉넉히 즐기려고, 배추 모종을 심었다. 정확히 25cm 간격으로, 자그마한 호미로 뿌리가 내릴 공간을 확보했다. 포기가 커져 서로 닿을 듯 말 듯, 좁으면 서로 부대껴 자라는데 방해가 될까 걱정을 하면서. 땅을 갈아 없지 않고 완숙된 퇴비로 약간의 밑거름만을 했다.

배추는 몇 번의 비를 맞으며, 땅 내를 맡고 제법 배추다운 모양을 갖추었다. 칼로 갈랐을 때 꽉 찬 노란 고갱이를 생각하니 너무나 행복해 미소가 귀에 걸리는 듯했다. 그러나 기대감은 얼마 가지 않아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처음엔 배추 겉 부분에 몇 개의 구멍이 나더니, 모기장이 되고, 얼마 가지 않아 몇 겹의 배춧잎은 양파망이 되었다.

혹시나 싶어 눈을 비비고 봐도 역시나 초록색 양파망이었다. 양파망 하나에 배추 하나씩 넣어 고랑에 서 있었다. 그것도 잠시 양파망을 만든 벌레란 놈들은 안으로 세력을 키웠다. 이런 몹쓸 벌레들. 밤으로 새벽으로 헤드 랜턴을 머리에 쓰고 핀셋으로 한 마리 두 마리 배추포기에서 포식하는 놈들을 잡아냈다. 분명 배춧잎을 갉아먹는 이 벌레는 징그러우면서도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차라리 괴물이라면 잡아서 돈이라도 벌 텐데 아무 쓸모도 없는 이 버러지만도 못한 벌레 같으니라고.

그런데 배춧잎을 갉아먹는 벌레 입장에서 난 뭐지? 천적, 혹은 거대한 괴물? 내 입장에서나 벌레지, 벌레는 자연이라는 한울타리 안에 나란 놈하고 뭐 차이가 있을까? 어쩌면 이 벌레가 나보다 먼저 지구라는 땅덩어리 안에 정착해 더 오래 살고 있었던 원주민(?)이었을 텐데. 나만 잘 먹고 살겠다고 뭔 짓을 하는지, 알량하게 조금 더 먹겠다고 `벌레'를 잡아내어 신발 뒤꿈치로 뭉개버리는 난 커다란 괴물. 하늘거리는 바람에 팔랑거리는 날갯짓을 하는, 꽃들에 희망인 나비였을 때는 어여쁘다 해놓고는 참 줏대 없는 짓이다.

벌레(?)의 부수를 가진 한자는 모두 악이나 혐오의 상징, 괴물로 등장한다. 뱀(蛇), 거미(蜘蛛), 벼룩, 개미(蟻) 등. 영화나 작품에서 등장하는 괴물이나 심지어 외계인까지 `벌레'를 형상화한다.

20여 년 전 한편의 애니메이션에 빠져, 한 사람의 작품으로 한 벽면을 빼곡히 채웠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어린 소녀가 무동력 비행체를 타고, 커다란 곤충의 형체를 한 괴물에 쫓기는 한 남자를 구하는 장면과 음악에 압도되면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분위기에 사로잡혀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보기를 반복하던 때가 있었다. 내용은, `인간을 위협하는 괴물 `벌레'는 인류가 초래한 재앙이다.

인간에 의한 오염, 자연은 적응하면서 진화한다. 그러면서 오염원을 정화한다. 정화하는 과정에서 독소를 배출하게 되는데, 인간은 그런 자연을 `악'으로 규정한다. 독소는 해독제였다. `악'으로 규정된 자연은 제거의 대상이고 정복해야 하는 괴물이었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해야 하는 우월적 존재이다. 그러한 인식의 상황에서 `나우시카'는 자연을 알게 되고, 자연 앞에 희생하고, 자연에 용서를 구한다. 그 결과 자연은 인간을 용서하고 다시 평화가 시작된다. 내 입장에서 제압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악이다. 악은 없어져야 하는 대상, 괴물이다. 그런데 누구의 입장에서 악인지?

내가 목적한 바를 실현함에 걸림돌이 되는 과정은 모두가 악이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래서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필요한 것만 취하게 된다. 자본주의에 입각한 개발에 걸림돌인 자연은 밀어내야 할 `악'이다. 내 생각과 맞지 않는 사람,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악이다. 벌레로 치부된다.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잡초와 벌레는 악이다. 해충과 익충을 구분하지만 해충을 잡으려 살포한 약에 익충이 죽는다. 익충인 `벌'이 없는 인류는 멸망이다. 자기 입장에서 단편적으로 만들어낸 `악'이 `독'인지 `해독제'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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