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의 겨울밤
황진이의 겨울밤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 승인 2019.12.09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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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 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사람을 평가할 때 그의 성별과 신분을 비중 있게 다루는 경우가 자주 있고, 이것이 잘 들어맞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 방법을 가장 비웃게 하는 인물 중 하나가 황진이이다. 16세기 조선(朝鮮)에 생존했던 황진이는 여성으로 또 기생으로 제약된 일생을 보냈을 테지만, 몇 안 되는 그의 문학 작품들은 결코 위축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의 재능이 사회적 관습의 벽을 넘고도 남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기까지 하다.


동짓달 기나긴 밤에(夜之半)

截取冬之夜半强(절취동지야반강)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春風被裏屈幡藏(춘풍피리굴번장)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有燈無月郞來夕(유등무월랑래석) 사랑하는 님 오시는 밤
曲曲鋪舒寸寸長(곡곡포서촌촌장) 굽이굽이 펴리라

시조(時調)로 잘 알려진 `동짓달 기나긴 밤에'의 한시(漢詩) 버전이다. 이 시조에 대해 피천득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수천 편을 가져와도 이와 견줄 수 없다고 하였고, 이병기는 우리 고전을 송두리째 빼앗길망정 이 시조 한 수와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높은 평가를 받는 시조 작품이라서 시조로 보아야 제 맛이 나겠지만, 한시(漢詩)로 보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밤이 길기로는 동짓달이다.

임이 아니 계시기에 더 길게 느껴지는 동짓달 밤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이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는 남다르다. 보통 같으면, 한숨 지면서 흘려보냈을 시간이지만, 시인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냈다. 마치 긴 천을 가위로 싹둑 잘라내듯이 동짓달 밤이라는 긴 시간을 가위로 잘라보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임이 안 계시기에 지루하고 외로운 시간이지만, 이것을 잘라 두었다가 임과 보내는 날에 꺼내어 쓴다면, 상황은 정반대될 것 아닌가?

그렇다면 보관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봄바람 표 이불 속이 제격이다. 왜냐하면 임이 계실 확률이 가장 높은 철이 봄이고, 임을 가장 가까이 보는 곳이 이불 안이기 때문이다. 그때 이불 속에 넣어두었던 동짓달 밤의 일부를 꺼내 놓으면, 짧기만 한 님과의 재회 시간을 길게 만들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일은 없으리라. 시간을 흐르는 물이라든가 화살에 비유하는 경우는 흔히 있지만, 시간을 이불 솜에 비유한 경우는 아마도 여기 말고는 없을 것이다. 참으로 독창적이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과연 대가다운 솜씨이다.

안방에서 떠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의 심사를 그리는 것은 한시(漢詩)의 한 영역이다. 이것을 시조에 끌어다 쓴 것이 이 작품인데, 중국의 역대 어느 작품에 견주어도 이 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독창성과 감성적 우월성은 이를 따를 작품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진이가 여성이고 기생이라는 선입견은 이쯤에서 버려야 한다. 그는 위대한 문학적 영혼의 소유자일 뿐이다.



/서원대학교 중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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