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의 배경음악
내 역사의 배경음악
  •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 승인 2019.12.08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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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박윤미 충주예성여고 교사

 

Wind of change 휘파람 소리로 시작한다. 빈 광장의 공기가 청명하게 울린다. 이어지는 클라우스 마이네의 음색은 부드럽고 거칠고도 진하다. 이 곡은 스콜피온스 밴드가 1989년 러시아를 방문하였을 때 직접 썼다고 한다.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을 예언했듯이, 또는 소망했듯이 이 노래와 함께 정말로 세상에 큰 변화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소련이 개혁하며 냉전 시대가 끝났고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다. 역사의 배경음악처럼 세계 곳곳에 울려 퍼졌던 이 노래는 시대 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세계가 무너졌던 어느 하루를 상징하는 곡이기도 하다. 1992년의 겨울이었다. 방을 따뜻한 온기로 채우고 싶지 않아 내 방으로 들어오는 보일러 관 밸브를 잠그고 지낸 지 며칠이었다. 러시아의 추운 광장 같은 방에서 점처럼 앉아 나는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었다. 감성 진득한 목소리가 조용히 내 방의 찬 공기를 진동시키기도 하고, 전자기타 줄 튕기듯 내지르는 금속성의 고음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기도 했다.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같은 곡을 끊임없이 반복해주고 있어, 내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긴 영화에 잘 어우러지는 배경음악이 되었다. 다시 날이 밝아올 것 같지 않은 긴 밤이었다.

어렸을 때 어느 신문에서 본 해외토픽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다리 셋 달린 사람이 있다는 기사였는데, 멋지게 정장 차림을 한 당당한 표정의 사진이, 이 믿을 수 없는 일이 허구가 아님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특별하게 태어나 세상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으니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같은 맥락으로 나는 동화 `백설 공주'에 나오는 일곱 난쟁이도 마냥 행복할 것이며, 그들이 광부로서 보석을 캐는 일은 즐거운 놀이쯤으로 생각했다. 난쟁이는 영원히 늙지 않으며, 나이를 먹더라도 마냥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그 표정만큼이나 실제로 행복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소설 속의 난쟁이 가족은 불행했다. 사회적 차별과 가난 속에서 계속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기만 하였다.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하고, 벗어날 방법도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내가 책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책 제목도 난쟁이들이 신기하고 즐거운 놀이를 할 것 같고, 심지어 그들이 사는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주소조차 동화 속 이름 같은데, 소설 속에서 만난 그들의 현실은 비참했다.

그동안의 내 순수에서 무지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들을 차별하는 현실만큼이나 내 무지한 눈도 그들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마음속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동화는 그 밤 동안 산산이 깨졌다. 책을 덮기까지 한순간 멈춤도 없이 끊임없이 부서지고 부서져 그 잔해는 내 유년을 저 너머로 가르는 강이 되었다.

수필 교실에서 내게 의미 있는 음악을 생각해 보는 과제가 있었다. 나는 단번에 그날 밤을 생각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상공에서 내 삶의 역사를 흐르는 강을 바라본다. 나는 유년의 강을 넘어, 사회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지금 이곳에 이르렀다. 그래도 돌아보니 꽤 오랫동안 동화 세상에 살던 기억이 현실을 이겨내는 큰 힘이기도 했다는 걸 알겠다.

진한 성장통을 겪던 이십 대의 그 겨울에, 내 한 세계가 부서지고 또 한 세계가 열리는 순간, 배경음악을 불러준 클라우스 마이네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본다. 역시 부드럽고 거칠고 진하다. 다음 노래도 참 좋다. still loving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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